나는 계절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특히 가을이 되면 우울감이 많이 올라왔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시원했고 푸른 하늘이 너무 예뻤다. 하루가 재밌고 신나다. 무슨 일이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그러다가 우연히 2년전 일기를 보게 됐다.
나는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었고 그 외로움의 크기가 너무 커서 폭식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오늘 전혀 외롭지 않다. 집에 혼자 있는데 전혀 외롭지 않다. 누군가와 소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즐겁다. 나는 나와 있는 시간이 너무나 좋다.
그전에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사람을 만나고 와도 너무나 외로웠다. 사람 속에 있어도 나는 이방인이 된 것 같았고 외로웠다. 다른 사람들이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곧바로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거라고 단정해버렸다. 그리고 밀려오는 외로움에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안든다. 나는 어리둥절해있다. “와, 이게 정말 병이었구나.” 싶었던 게 병이 낫고보니 정말 거짓말처럼, 무의미함, 외로움이 사라졌다.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그 순간을 즐기기 됐다. 친구와 놀고 와서도 외로움이 들지 않았다. 나는 십년만에 찾아온 놀라운 변화에 엄청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기분은 마치, 냉탕에 있다가 온탕에 들어간 느낌…. 그 온도차가 너무 심해서 충격적이다.
병이 나으니, 우울증이 오기 직전이었던 중3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는 중3때 꽤나 건강한 생활 패턴을 보였다. 학교에 가서 공부에 집중하고, 집에 돌아오면 잠시 쉬다가 숙제나 자습을 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좋은 성적을 내고 싶어서 중3 2학기 중간고사부터는 학원도 다니지 않았다. 스스로 절제된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보고 싶은 드라마나 만화를 보면서 놀았다. 외롭거나 답답하다거나 무기력하지 않았다. 드라마와 만화는 삶의 활력소라 그거 보는 재미로 살았다. 재밌었다. 음식을 과하게 먹거나 새벽사이에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일도 없었다. 적정량을 먹었고 산책을 나갔고 공부를 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하지만 우울증이 시작된 후부터는 그런 생활이 사라졌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우울증을 겪는 동안 나는 식물인간이었다. 삶의 활력을 잃고 그저 언제나 이 생이 끝날까 기다리기만 하는 처지였다. 우울증 이전의 나는 삶에 애살이 많았고 하고 싶은 것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병이 낫고 나니, 그때의 나로 돌아온 기분이다. 십년동안 침상에 누워 있다가 꺠어나보니 나는 이미 서른살이 훌쩍 넘어버렸다. 나는 아직 중학생때의 생각과 마음 그대로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이것을 사고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울증을 겪었던 순간들도 다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아니, 무의미한 순간이었다고, 인생을 허비했네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든 쓸모 있는 경험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난 다짐한다. 모든 순간이 값진 순간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