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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리아 Jun 14. 2020

한때는 찬장이자, 옷장이자, 책장이었던 것

우리 집 몇몇 가구는 용도를 달리해 방을 전전했다. 내가 ‘그것’을 처음 만난 건 일곱 살.


그것은 할머니 집 창고방에 '찬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찬장이지만 진열의 느낌보다는 누적의 느낌이 강했는데, 부엌에 미처 수납되지 못한 그릇이나 식기들은 죄다 그 찬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 창고방이 선하다. 창고는 아니지만 창고로 쓰이던 그 방. 바닥 표면에 장판이 온전히 접착되지 않아 발을 옮길 때마다 쩍쩍 소리가 나던 방.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사시사철 서늘한 그 방이 좋았다. 기껏해야 세 평 남짓이던 공간이 6살 내 눈에는 어찌나 커 보였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나에게 창고방은 집의 온기가 닿지 않아 쓸쓸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의연한 느낌이었다. 본연의 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그것'은 말 많고 피곤한 세상을 피해 스스로 독립과 고립을 택한 존재 같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엄마, 아빠, 나, 동생 네 식구는 할머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창고방은 엄마 아빠 방이 되었고, '그것'은 젊은 부부의 살림에 밀려 창고방에서 지하실로 가야만 했다. 몸이 자라며 창고방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고, 보일러가 잘 들어오는 엄마 아빠 방에 있으면 창고방 시절의 서늘한 느낌이 그립기도 했다. 


'그것'이 마침내 지하에서 지상으로 몸을 옮긴 것은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다. 집에 방이 부족한 관계로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 남동생과 같은 방을 썼다. 하지만 중학생이 된 이상, 남동생과 같은 방을 쓸 수 없었기에 대신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아이들 몸은 커가지, 커가는 몸에 맞춰 옷들도 많아지지, 하지만 집 평수를 늘릴 순 없으니 부모님은 가족 공동의 옷장을 하나 더 두기로 했다. 엄마 아빠는 침대를 치우고 '그것'을 당신들 방으로 들였다. 중년 부부의 살림은 '그것'에 밀려 영원히 우리 집을 떠나야만 했다. 


옷장으로 용도를 변경한 찬장은 마치 개명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옷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문제는, 내가 그 옷장을 싫어했단 거다. 한참 외모에 민감할 나이에, 할머니랑 같이 방을 쓰는 것도 억울한데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엄마 아빠 방에 들어가 옷을 꺼내는 걸 좋아할 리가. 또 싫었던 이유는 유리문 때문이었다. 본래 찬장으로 태어난 가구답게 양문이 유리로 되어있었는데 견고한 가구가 아니다 보니, 문을 열 때마다 유리가 후들거렸다. 하필 가구의 가장 위쪽에 강력한 자석이 달려있어서 문은 부드럽게 열리는 일이 없었다. 아주 조심조심  문을 열어도 유리 문은 언제나 ‘대앵-’ 소리를 내며 미약하고 하찮게 후들거렸다. 사춘기 시절, 자기 방에 틀어박혀 패션쇼를 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후들거리는 유리 문을 붙잡고 무엇을 입어야 싸이월드에 올릴만한 사진을 건질까, 고민하며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온전한 내 방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으로서 학업에 집중해야 했기에, 동생이 할머니와 한 방을 쓰기로 합의했다. 찬장으로 태어났으나 옷장이 된 '그것'은 마침내 책장이 되어 내 방으로 입성했다. 후들거리는 유리 문을 떼어낸 모습이 얼마나 속 시원하던지. 사실 '그것'은 책장이 되기에는 폭이 너무 넓었지만, 나름 쓸모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지는 않고 모으는 병에 걸린 나는 이미 굉장히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손이 가지 않는 책이나 전집들을 뒤로 배치하고 (제목만) 자주 읽고 싶은 책들을 앞으로 꽂아 두 줄로 책을 넣었다. 심지어 가장 아래 열은 와인이나 담금주를 진열할 수 있도록 높이가 꽤 높았는데, 덕분에 그림책같이 키가 큰 책들도  꽂기에 충분했다.  


맨 밑에는 서랍 두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레일이 없어서 서랍을 열 때마다 무겁고 뻑뻑했다. 난 이 서랍을 남자친구에게 받은 선물이나 편지를  숨겨놓는 서랍으로 사용했다. 언제나 우리 집에서 '공공재'역할을 수행하던 '그것'은 이제 온전히 내 방의, 내 전용 가구가 되었고 그 지위에 걸맞게 비밀들을 간직하기 시작했다. 레일도 없는 무거운 원목 서랍. 하필 서랍 하나는 손잡이마저 똑떨어져, 항상 얇은 쇠로 된 자를 서랍 사이에 넣어 살살 연 다음 손으로 힘껏 서랍 전체를 잡아당겨야 열수 있었다. 이렇게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비밀을 간직하기 안성맞춤이었고, 나는 아직도 식구 중 누구도 그 서랍을 열어본 적 없으리라 확신한다. 


찬장이었다가, 옷장이었다가, 책상이었던 '그것'이 우리 집을 완전히 떠난 것은 2016년 1월, 내가 자취를 시작하면서다. 그러니까 '그것'과 나는 집을 함께 나온 셈이다. 독립한지 5년 차, 찬장은 없어도 번듯한 옷장 2개와 쓸만한 책장 1개를 두고 살고 있다. 그런데 가끔씩 그립다. '그것'을 처음 만난 창고방의 서늘한 기운과,  뻑뻑하고 무거운 서랍을 마음먹고 열어야 했던 날들이. 지금은 집 구석구석 온기가 잘 닿는 곳에 산다. 서늘한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가스비 걱정을 하며 살고 있다. 마음먹고 들춰볼 것들도 많지 않다. 이제는 모든 것이 손에 쉽게 닿는다. 무언가를 간직하는 행위마저 간단해져 기억의 힘을 간과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떠올리는 것뿐이다. 쓸쓸하지 않으면서도 서늘하고 싶을 때, 혹은 말 많고 피곤한 세상을 피해 스스로 독립과 고립을 택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그것'을 떠올린다. 한때는 찬장이자, 옷장이자, 책장이었던 것의 기억은 금세 소환된다. 정말 '그것'이 5년 전 겨울, 우리 집을 영영 떠난 걸까, 의심이 들 정도다. 아직도 눈을 감고 유리 문을 열면 '대앵-' 하고 후들거리던 소리가 들린다, 미약하고 하찮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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