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번 째 주 금요일 저녁, 해물술상
금요일 오후. 정신없이 일에 매달리다 문득 '내일이면 주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묘한 안도감에 휩싸이게 될 때면, 그 기분 좋은 설렘은 자연스레 술 생각을 부른다. 다른 때라면 다음날 걱정에 아련한 술의 부름을 묻어 두겠지만, 뭐가 걱정인가. 오늘은 금요일이다. 퇴근시간을 조금 앞두고서는 급히 술친구를 찾는다. 비슷한 생각을 지닌 친구들이 많았는지 술친구 찾기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제는 무엇과 술을 마시냐는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건 해산물 안주를 곁들이는 술상. 해산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듯, 오늘 저녁을 근사하게 만들어줄 제철해산물을 몇 가지 추려보기 시작한다. 온종일 날이 더워서였을까, 이 더위와 잘 어울리는 안주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바로 멍게. 7월로 접어들면서 푹푹 찌는 날씨에 입맛을 잃기 쉬운 요즘, 시원하고 향긋한 맛을 지닌 멍게는 훌륭한 술안주가 되어 줄 듯싶다.
다짜고짜 멋대로 정한 오늘의 안주를 고하고자 전화를 건다. 하지만 이어지는 답변은 봄도 아닌데 왠 멍게냐며 이어지는 볼멘소리.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사실 멍게는 여름이 되어서야 그 맛이 최고조로 무르익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칠맛을 내는 글리코겐이 겨울 대비 7배까지 높아진다는데, 과학에 약한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믿음이 가는 사실처럼 보이면 그만이다. 이렇게 글리코겐 함량까지 들먹이며 아는 척을 해대니 친구도 조금은 수그리고 들어올 수 밖에.
오늘은 멍게다.
금요일 저녁의 만남은 보통 인사가 길지 않다. 한잔 들어 올리며 하는 말이 인사를 대신하는 탓이다. 만나자마자 인근 횟집으로 들어갔다. 우선 멍게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달라하니 멍게는 메인회를 시키면 서비스로 나간다며 메인회를 권한다. 금요일 밤에 한 자리 차지해놓고 멍게만 주문하기엔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리하겠다고 한다. 메인 메뉴 취급을 받지 못하는 멍게의 처지가 퍽 서글프다. 그러고보면 멍게는 항상 횟집의 조연이었다. 어떤 회를 먹든 곁들임 찬으로 항상 달려나오는 존재. 멍게의 사촌뻘인 돌멍게와 비단멍게는 나름은 비싼 몸값을 자랑하며 가격표 옆에 '싯가'라는 글자를 붙이고 당당히 그 위용을 드러내는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초라한 처지다. 금요일 저녁의 감수성 때문인지 괜시리 그 처지가 남일 같지 않아 더 마음이 쓰인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순간 주문한 술과 곁들임 찬이 탁하고 놓인다. 술이 나오니 친구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잔에 가득 채운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은 후 주황빛 속살을 드러내며 시각을 자극하는 멍게를 한 점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베어물자 느껴지는 물컹한 식감과 향긋함, 달짝지근하면서도 쌉싸름한 뒷맛이 묘하게 혀를 자극한다. 그리고 이내 달달한 끝맛이 그 긴 여운을 전하고 나니 소주의 쓴맛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이런 멍게의 달콤쌉싸름한 맛은 미각을 자극하며 식욕을 돋운다. 전채음식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멍게. 메인안주에 곁들여나오는 조연으로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제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내는 멍게의 모습을 보니 봐주는 하나없어도 한주동안 열심히 달려온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아 아직 허전해" 곁들임찬에 회 한 접시까지 말끔히 비운 친구는 밥을 먹지 않아 연신 허기지다고 아우성이다. 횟집 메뉴판을 보고는 식사류에 자리 잡고 있는 멍게비빔밥 하나를 주문한다. 이내 등장한 멍게 비빔밥. 고슬고슬 잘 지어진 밥 위에 먹기좋게 썰어놓은 멍게가 그 빛깔을 뽐내며 살포시 올라가 있었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더한 후 슥슥 잘 비벼 한 입 크게 떠 입으로 가져간다. 부드럽고 여린 멍게살에서 나는 좋은 향과 채소의 신선함, 그리고 참 기름의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하다. 그런데 가만보니 이 멍게비빔밥에서 멍게는 온전히 본인 역할을 잘 해내는 주인공이다. 본인의 자리에서 자기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다 때가 왔을 때 본인을 온전히 드러내는 멍게. 흔한 불평보다는 내 자리에서 나의 역할을 온전히 다해내는 것이 기회를 만드는 방법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오늘은 멍게가 선생님이구만?!" 한마디에 친구는 갑자기 무슨소리냐는듯 먹던 비빔밥을 놓고 멍하니 쳐다본다. 왠지 그 표정이 멍게같이 생겼다.
멍게 제철?
멍게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시기는 5월 초부터 8월 말까지. 5월부터 맛이 들기 시작하는 멍게는 6월 초부터 8월 말까지 그 맛이 무르익게 되는데, 실제로 이 시기의 멍게는 겨울철에 비해 감칠맛을 내는 글리코겐이 7배나 많이 함유되어 있다. 우리나라만큼 멍게를 좋아하는 일본에는 "음력 5월의 멍게는 시집 온 며느리에게도 주지 마라"라는 속담 있을 정도로 여름철 멍게는 그 뛰어난 맛으로 사랑받는다. 혹자는 멍게의 제철을 봄철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가을에서 봄은 자웅동체인 멍게의 산란 및 번식기이기 때문에 식감이 무르고 맛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계절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양식 멍게의 출하시기가 주로 봄이기에, 양식 멍게를 판매하는 업자들로부터 이러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싱싱한 멍게 고르는 법?
싱싱한 멍게를 고르기 위해 가장 먼저 살펴봐야할 부분은 바로 껍질. 겉표면의 붉은 색이 진하고 돌기가 선명할수록 잘 자란 멍게다. 또한 가능하다면 한 번 만져보도록 하자. 만져봤을 때 흐물흐물한 것보다는 어느정도 단단한 것이 신선한 멍게다. 향으로도 멍게의 신선도를 가늠할 수 있다. 멍게의 독특한 향은 '신티올'이라는 불포화알코올 성분에서 나는데, 이 성분은 멍게가 신선할 경우 은은하게 향긋한 냄새를 뿐지만 멍게의 신선도가 떨어진 경우 비릿한 냄새를 낸다. 혹여나 멍게의 향을 잘 모르겠다면 지나치게 향이 진한 멍게를 피하면 된다.
▲ (좌)돌기의 돌출 정도가 심하고 붉은 색이 진하게 도는 잘 자란 멍게, (우)겉표면이 쭈글쭈글하며 단단하지 않은 덜 신선한 멍게
뇌를 스스로 먹어버리는 멍게?
멍게는 유생 시기에 올챙이와 유사한 형태로 지낸다. 그러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정착하고 나면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장기인 뇌를 스스로 소화시켜 없애버리면서 부착생물 형태로 변한다. 그러고보면 '멍게 선생님'이지만 뇌조차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