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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담쟁이 Jun 29. 2016

지리산 가는 길


남편과 교외에 나갔다가 '갈까? 가자!'하는 식으로 순전히 즉흥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갈아입을 옷 한 벌, 씻을 세면도구 하나 없이 우리는 바로 지리산을 향해 떠났다.


가는 도중, 인근에 새로 난 길이 있으니 그 쪽으로 지나가 보자는 남편의 말에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막상 접어들고 보니 비포장 도로. 차를 되돌리기도 마땅치 않아 우리는 그대로 직진했다. 어제 내린 비로 진창이 된 흙길에 시간이 지날수록 차는 점점 볼썽사나워졌다.



그렇게 얼마를 더 갔을까? 좀 있으니 고택 몇 채를 품은 마을이 나왔다. 집성촌처럼 보였는데 아직은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었다. 담 위쪽에서 아래로 길게 늘어진 능소화와 흙담에 기대어 나란히 서있는 접시꽃들을 만났다. 퇴직 후 이런 곳에 살게 되면 이런저런 화초를 키우자는 말들을 나누며 우리는 마을을 빠져 나왔다.


오늘 중으로 도착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염려도 되었지만 마음은 느긋했다. 목적지야 언제든 수정하면 되는 것이고 조급함은 좀 더 갈 길이 먼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두면 될 테니까.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지만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실시간 편한 길'은 외면하고 옛 도로로만 달렸다. 사람 사는 냄새를 맡으려면 좀 불편하더라도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


몇 시간 후 우리는 마침내 지리산 자락으로 접어들었다. 두 시간이면 족했을 거리를 무려 네 시간 넘게 달려온 셈이다.



올라가는 도중에 ‘칠선계곡’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산세가  문득 궁금증을 자아내었다. 우리는 차를 되돌려 계곡으로 들어갔다. 계곡 안쪽에는 제법 큰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지만 커다란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낙수와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새소리만으로도 마을은 이미 소란스러웠다. 민박집들은 대체로 소박했고 마을은 평화로웠다. 근처에 사찰이 있다고 해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사찰 올라가는 길 양쪽에 보리수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물방울을 머금은 빨간 열매가 탐스러워 몇 알을 따서 입에 넣었다. 열매의 맛은 강렬하지 않아 사찰과 잘 어울렸다.

 


다시 노고단으로 향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빗방울도 굵어졌다. 성삼재에 차를 세우고 우산을 꺼내들었다. 사방에 잔뜩 낀 구름들로 인해 지리산의 비경은 볼 수 없었다. 노고단을 향해 몇 발짝 올라가기도 전에 우리는 추위로 되돌아 내려왔다. 며칠 동안 계속된 더위로 옷을 가볍게 입은 데다 준비도 없이 덜컥 이토록 높은 곳에 올라왔으니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날씨마저 오락가락하니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휴게소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추위를 달랬다. 조금 있으니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산은 제 모습을 드러내더니 몸에서 물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을 향해 거꾸로 올라가는 폭포수처럼 보였다. 우리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음을 깨닫고 서둘러 내려갈 채비를 했다. 내려가는 길에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구례 산수유 마을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은 화엄사를 거쳐 울산으로 되돌아왔다.


 

젊은 시절 이 산을 올랐을 때가 생각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산에 올라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캄캄한 밤을 쉬지도 않고 내달렸던 여행이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여행을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산을 내려가고 있다. 목적지가 어디이며 언제 도착하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남은 여정을 즐기며 내려갈 테니까. 우리가 겪었던 모든 것들은 미지의 세계로 떠날 사람들에게 남겨두고 천천히 산을 내려갈 것이다. 내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놓고 나를 자극하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씩 느끼며 천천히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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