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은 독이다.

by 교실남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by 프리드리히 니체


2018년 2월, 당시 나는 1년 간의 행복한 신규교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공군 훈련소에 입영했다. 육군이나 해군이 아닌 상대적으로 복무 기간이 긴 공군에 입대한 이유는 공군이 타군에 비해 휴가도 많고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잘 되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자친구가 강력하게 공군에 가기를 원했던 이유도 있었다.(하지만 일병 때 차였다는....ㅎㅎ)


사실 원래 계획은 꿀보직과 집 근처 자대에 배치를 받아, 안전하고 편안한 군생활 2년을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훈련소에 입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계획은 바뀌었다.


'아... 조교가 너무 하고 싶다.'


훈련소 조교들의 멋진 발성, 절도 있는 동작, 압도적인 카리스마, 남성미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교의 큰 메리트는 2년 동안 다 큰 성인들을 대상으로 내가 좋아하는 교육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학교에서처럼 20~30명의 학생들이 아닌, 수백 명의 어른들 대상으로!


당시 훈련병으로서 내가 느끼기에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던 조교들의 교육적 모습 또한 나의 교육적 열정에 불을 지폈다.


"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저 조교는 계속 우리들에게 화를 내고 얼차려를 주는 거지? 굳이 이렇게 인격적으로 모독을 줄 필요가 있을까? 더 나은 교육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나라면 어떻게 할까?"


이런 고민들이 몇 날 며칠 계속되자 난 차라리 내가 조교가 되어 병영문화를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조교 면접 후 선임 조교와의 면담)


선임조교가 내게 물었다.


"훈련병은 왜 조교에 지원했습니까?"


나는 감히 조교 앞에서 당돌하게 대답을 했다.


"폭언과 얼차려가 없는 그리고 강압적이지 않은 훈련소 문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선임조교가 콧웃음을 치며 말했다.


"얼차려 없고, 강압적이지도 않은 훈련소? 그게 가능할 거 같습니까? 그건 훈련병이 있던 학교에서나 통할 수 있지 여기 군대에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질 나쁜 훈련병들을 말로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본 조교가 1년 넘게 여기서 생활했는데 그런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사람은 본디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귀찮고 힘들더라도 일일이 훈련의 취지와 훈련소 생활 방법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제가 진심으로 훈련병들에게 다가간다면, 얼차려, 폭언 없이도 충분히 훈련병들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 개월 후)


조교과 된 나는 조교 연성과정(조교가 되는 시험)을 마치고 바로 차수에 투입이 되었다. 투입이 되자마자 난 내가 다짐했던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이라 낯설고 어색한 훈련병들에게 소리치기보다 훈련병들이 모르는 부분들을 재빨리 캐치해서 설명하는데 집중하기. 환경정화 활동을 할 때, 가만히 서서 지시만 하지 않고 먼저 나서서 솔선수범하기. 훈련병들에게 금지한 것들은 나도 하지 않기. 정서적으로 불안해 보이는 훈련병들과 선제적으로 상담하고 이야기 들어주기. 같은 병사로서 훈련병을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도움이 필요한 동료로 바라보기. 책 읽고 좋은 구절 들려주기. 같이 체력 단련하기. 얼차려 주지 않기.


당시 막내 조교로 투입이 되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훈련병들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훈련병들에게 소리치지 않고, 얼차려도 주지 않는 나는 선임들과 동기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야, 너만 착한 사람이야? 너만 착한 사람이냐고! 우리는 무슨 소리치고 싶어서 치는 줄 아나!"


"훈련병들한테 인기 얻으려고 그러는 거 아냐? 안 그래도 보니깐 저번에 모범조교 또 떴던데. 모범조교로 또 휴가 받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00아. 네 교육적 철학은 존중해주는데, 우리가 너무 힘들다. 소리칠 때는 같이 화내고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안 하면, 일단 선임들이 엄청 뭐라 해. 그리고 훈련병들도 소리 안 치면 정신 못 차리고..."


하지만 나는 이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걸었다. 얼차려, 폭언 없이도, 강압적인 것들 없이도 충분히 훈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1년 후)


1년 동안 정말로 열심히 훈육을 했다. 그 시절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훈육을 잘할 수 있을까?'밖에 없었다. 근무 시간이 아닌데도 훈육에 대한 열정으로 대대에 출근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총 6차수 중에서 최우수소대 1회, 우수소대 2회, 모범조교 6회 선정이라는 꽤 좋은 성과도 냈다. 그것도 기존의 내 교육철학과 방법을 그대로 고수한 채 말이다. 어느 정도 짬이 차고, 좋은 성과들을 보여주자, 소대장님과 선임조교들도 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리어가 쌓이면서 주변의 인정을 받으면서부터 나에게 일종의 '자존심'이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교육철학은 신성불가침한 영역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나의 교육에 대해 비난을 하면 설사 그 비난이 타당한 것일지라 하더라도 나 또한 그에 맞서서 거세게 비난을 했다. 그때 당시의 나는 '나의 교육은 곧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교육 방식에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이 있었다. 일단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었다. 훈련병과 래포(친밀감) 쌓는 것부터, 한명한명 챙기고 신경 쓰고, 솔선수범하고 등등... 그리고 가끔씩 소대 분위기를 흐리는 훈련병들이 생기면, 나의 방식으로는 소대의 분위기를 재빨리 바로잡기가 힘들었다. 오죽하면 몇몇 훈련병들이 '제발 조교님, 저희들한테 화를 좀 내주십시오.'까지라고 말을 할 정도였으니...


때문에 최고의 소대도 양성했지만 최악의 소대도 양성한 전력이 있었다. 운이 좋아 이런저런 아다리가 잘 맞아서 훈련병과 래포가 잘 형성이 되면, 동기부여가 잘 형성되어있는 멋진 소대가 될 수 있었지만, 몇몇 분위기를 흐리는 훈련병들이 있을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좋게 말을 하고 진심으로 다가가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기 싫었다. 인정을 하면 그동안의 내 신념을 부정하는 것이 되었기에... 이들을 효과적으로 훈육할 수 있는 다른 훈육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했다.




몇 달 후, 나는 대대의 으뜸병사(일종의 조교 대표)가 되었다. 으뜸병사는 훈련병 훈육을 하기도 하지만, 주로 조교들의 의견 수렴, 조교들과 간부 사이의 소통, 휴가 관리 등의 넓은 시야를 필요로 하는 일들을 맡는다. 일을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대대 내의 조교들이 전부다 나처럼 훈육을 하면 어떻게 될까? 때로는 누군가가 강하게 잡아주기도 누군가는 풀어주기도 해야 하는데, 나처럼 풀어주는 사람만 있다면 당나라 군대가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동안 내가 7차례나 모범조교를 받은 것은 진짜 내 실력이었을까? 내가 그만큼 잘해주고 듣기 좋은 말을 해주니깐 인기투표로 나를 뽑은 건 아닐까?"


"혹시 그동안의 신념이 나의 성장을 가로막은 것은 아닐까?"


그동안 나의 훈육이 객관적으로 보이면서 반성이 되었다. 여태까지 나의 훈육은 진정 훈련병들의 훈육을 위해서가 아닌, 내 신념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훈육이었다. 내가 이 타이밍에 따끔하게 쓴소리를 해야, 훈련병들이 경각심을 가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를 외면했다. 군대라는 특성상 정말로 정신교육이 필요할 때는 얼차려가 가끔씩은 필요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를 부인했다.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도구를 쓰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원래 내가 쓰던 도구와 정체성만을 고집했고, 스스로 성장의 기회를 막아버렸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의 저자 제임스 클리어는 습관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자신의 약점을 부정하고 진정한 성장을 가로막는 일종의 '자존심'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이때 문제가 생기는데 어떤 아이디어가 신성불가침한 것일수록, 우리의 정체성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을수록 비난에 더욱 강하게 맞서게 된다고 한다. 조교 시절의 나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자기 방식으로만 일할 것을 강요하는 관리자, 온라인 교수방법을 배제하고 기존에 하던 오프라인 수업만을 고수하는 선생님, 감동적인 첫 번째 앨범을 만들어내고 나서 틀에 박힌 앨범을 발표하는 가수 등등...


우리가 어떤 정체성이나 신념을 고수할수록, 그것을 넘어 성장하기는 힘들어진다. 오히려 도태되기도 부러지기도 한다.



조교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혹여나 지금 내가 특정한 정체성이나 신념에 사로잡혀 내 스스로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 지 반성해본다.


#과거회상 #신념 #정체성



<참고문헌>

「아주 작은 습관의 힘」- 제임스 클리어 p.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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