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처음은 어렵다.

by 교실남

(3년 반 전 군 복무 시절)


"훈... 훈련병들! 주.. 주목!"

"주목!"


800명이나 되는 훈련병들이 '주목'을 외치며 이제 갓 조교가 된 나의 말에 반응을 한다. 뻣뻣한 차렷 자세를 유지한 상태에서 고개만 나를 향해 돌린다. 총 1600개의 눈이 오직 '나'만을 보고 있다. 심장이 쿵쾅댄다. 후...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대사를 이어간다.


"보급조교가 전파하겠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 후, 전투복 치수 교환이 있을 예정이니..."

하... 갑자기 다음 대사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의 내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아... 망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다음 대사를 이어나간다.


"(...) 전투복 치수가 안 맞는 훈련병은... (머뭇) 방송이 나오면 점호장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합니다."


"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선임이 답답했는지, 훈련병들 보는 앞에서 내려오라고 손짓한다. 선임이 대신 올라가서 다시 설명한다.


"(근엄하게) 훈련병들 주목!"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주목!!!!"

하... 이게 상병과 이병의 클라스 차이인가...



그날 같은 보직 선임(나보다 4살 어렸음)이 나에게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너는 무슨 학교 선생님이라는 놈이 왜 이렇게 말을 못 하냐? ㅋㅋㅋ 훈련병들 앞에서 어버버 거리고. ㅎㅎ 학교 선생 뭐 별 거 없네. (웃음)"


기분이 나빴지만 선임의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까 내가 말을 잘 못 한 것은 팩트였기 때문이다. 반에 25~26명 아이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과 성인 800명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느껴지는 압박감과 무게감이 달랐다.




그날 이후 몇 번 더 훈련병들 앞에 설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버벅거렸다. 이어지는 선임의 질타,


아니, 넌 왜 그것밖에 못 하냐!

문제는 훈련병들 앞에서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대 내의 자잘한 일들(외등 켜기, AED 준비하기, 청소, 제초), 구령 넣기, 훈련병들 교육 등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색했다. 근데 이상하게 부족한 부분들을 만회하려면 할수록 사고가 계속 터졌다. 그때마다 선임들의 질타가 쏟아졌고, 내 자존감은 하락했다.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실수가 잦아지니 급기야 조교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 진짜 나는 조교를 해서는 안 되는 건가... 재능이 없는 건가... 그냥 그만둘까...'




너무 힘들어서 담당 소대장님께 상담을 받았다.


소대장님께서 인자하게 말씀하셨다.


"00아. 누구나 처음에는 다 어려워. 처음부터 잘 하기는 정말 힘들어. 네 선임 김화랑 조교 봐봐. 화랑이 같은 경우에도 이병, 일병 때 얼마나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는데!"


"(깜짝 놀라면서) 김화랑 조교 말씀이십니까? 혹시 농담 아니십니까?"

당시 병장이던 김화랑 조교는 (이름도 멋있다.) 깔끔한 일처리 능력, 칼 같은 시범, 까랑까랑한 발성, 대대원들을 아우르는 인성 등으로 후임 조교들의 워너비이자 우리 대대의 에이스 조교였다. 근데 그런 사람이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걔 얼마나 사고를 많이 쳤는데! 시범도 엄청 못 했어. 동기들 중에서 아마 제일 못 했을 걸? 처음에는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어서 나도 깜짝 놀랐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대대 내에서 가장 시범으로 유명한 김화랑 조교가 시범을 못 했다고?


"근데 얘가 신기하게 그렇게 욕을 들어가면서도 꾸준하게 노력하는 거야. 그렇게 욕을 많이 들었으면 주눅 들 법도 한데, 전혀 주눅도 들지 않고... 그러다 딱 상병이 되니깐 지금 네가 아는 화랑이의 모습이 나오더라. 그니깐 00아. 누구나 처음엔 어렵고 힘들어. 많이 시도하고 또 많이 실패하면서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야.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깐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내 워너비였던 김화랑 병장의 일이병 시절의 얘기를 듣고 나니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김화랑.jpg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주눅 들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나이, 직업, 자존심 모든 걸 내려놓고 오직 실력 향상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선임들이 일을 못 한다고 혼을 내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냉정하게 내가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지 따졌다. 항상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일 잘하는 선임들에게 가서 선임이 귀찮다과 저리 가라고 할 정도까지 계속 질문을 했다. 부족한 시범과 발성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시범과 발성 연습을 했다.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억지로 훈련병들 앞에 자주 서서 얘기를 했다.




(1년 후)


"(칼 같은 동작 후) 대대~~~~ 차렷!"

(훈련병, 조교, 소대장 일제히 차렷)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필승! 신병 0대대 아침점호인원보고. 총원 1020명, 결원 무, 현재원 1020명. 이상 아침점호 끝!"


(아침점호가 마치고)


"와... 000병장님, 오늘도 발성 쥑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소리를 낼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매 번 훈련병들 앞에서 군가 가르치시고 연설하시는 것도 대단하십니다. 저는 발성도 안 되고 시범도 안 되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걱정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원래 누구나 처음은 어려운 거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예전에 난 너보다 심했어.ㅎㅎ"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과거의 나의 모습을 지닌듯한 아이들을 많이 만난다.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 평생 수학을 놓고 있다가 이제 막 수학을 시작하려고 하니 힘이 든 아이, 새로운 것에 도전했는데 기대한 성과가 안 나와서 좌절한 아이 등등... 이 친구들과 상담을 할 때면 나는 항상 군대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준다. (너무 꼰대 같나? 의외로 우리 반 아이들은 군대 얘기를 좋아한다. ㅎㅎ 음... 좋아하는 척하는 걸까?...)

잊지 말자.


누구나 처음은 어렵다. 결코 내가 못나서가 아니다.


#군대생활 #도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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