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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Nov 08. 2023

일을 할 때 티를 내야 하는 이유

5년 전, 초임교사 시절이었다. 교사 연구실에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옆 반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셨다.

"교실남 선생님. 음... 이거 말해도 되나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자기랑 내가 친분이 있으니깐..."


"(긴장한 채로)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게... 사실은... 나도 부장님한테 들은 얘긴데... 선생님이 작년에 운영한 하모니카 동아리를 올해도 한다고 했잖아... 근데 어느 학년 부장님이 엄청 반대하셨다고 하더라고... 걔한테 학교 운영비 지원해 주면 절대 안 된다고... 그 이유가... 작년에 동아리 운영하는 걸 한 두 번 밖에 본 적이 없다고, 진짜 책임감 없는 선생이라고 말했다고 하더라고... 선생님 담당 부장님은 관리 잘 못해서 미안하다고 다른 부장들한테 사과도 했대. 아, 그리고 00 선생님은 소수의 아이들만 가르치는 하모니카 동아리를 운영할 바에는 차라리 전교생한테 공책을 사주는 게 낫다고 그랬다고 하네. 형평성 문제 때문에 학부모 항의가 들어올 수 있다고..."


"(열이 확 올라오며) 음... 뭔가 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맞지? 오해지? 내가 선생님 신규 때부터 봐와서 잘 아는데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거 아니깐... 나도 정말 깜짝 놀랐어..."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니, 내가 작년에 최소 60~70번은 운영한 동아리를 1~2번 운영했다고 말했다고? 그것도 교감 선생님, 교장 선생님 다 있는 자리에서? 그리고 왜 작년 학년 부장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 계신 거지? 작년에 아침시간, 점심시간 내도록 내가 애들한테 하모니카 가르치고 있을 때, 그때 부장님이랑 다른 선생님들은 연구실에서 희희낙락 차 마시면서 놀고 있었잖아! 그리고 형평성 문제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작년에 4학년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희망 인원을 조사했고, 현재 학년 전체의 2/5 정도 인원인 60~70명이 하모니카를 배우고 있는 상태인데, 심지어는 배우고 싶은 학생들은 언제든지 참여해도 상관없다고 공지했는데, 이게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1인 1악기 배우는 것보다 공책 한 권씩 사주는 게 더 낫다고? 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1년 간 내 노력이 폄하된 거 같아서 너무 기분이 나빴다.


'그래, 인정해. 내가 작년에 슬럼프로 인해 학급경영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래도 하모니카 동아리는... 하모니카 동아리만은 진짜 최선을 다했는데... 이건 아니잖아...'


2018년은 내 인생 최악의 한 해였다. '나는 왜 살아야 하나?'의 의문을 가지고 1년을 헤맸다. 삶의 의미를 잃고 게임, 술로 현실도피하며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슬럼프라고 해서 내가 학교에서 멍하니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내 나름대로 교육에 대한 열정을 되찾기 위해 계속 새로운 것들을 시도했다. 주말에 아이들이랑 모여서 피구하고 영화 보기, 새벽에 애들이랑 산타기, 과학대회 학생지도, 독서토론 동아리 등 열정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두 누가 시켜서가 아닌, 내가 자발적으로 찾아서 한 활동들이었다.


하모니카 동아리도 그중 하나였다. 교장 선생님께 특별히 허락을 받아, 1년 내내 아침시간, 점심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하모니카를 가르쳤다.


"선생님, 하모니카 부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선생님, 하모니카 동아리 오늘은 왜 안 해요? 매일 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씩 내 자존감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 회복되었다. 때문에 하모니카 동아리에서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1년 동안 아이들을 지도했다.


하지만 나에게 돌아온 건, '책임감 없는 교사'라는 낙인이었다.




말 안 하고 가만있자니, 너무 억울해서 작년 담당 부장님께 바로 찾아갔다.


"부장님! 제가 작년에 일을 잘 못 한건 맞지만, 그래도 하모니카 동아리는 열심히 했던 거 알고 계시잖아요? 거기 있던 부장님이 한 얘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저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한 거는 뭐 이해하는데... 근데 그런 거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서 미리 증거물로 남겨뒀어야지. 기록이 없으면 안 한 거나 마찬가지야."


"아니, 실제로 아이들이 저한테 하모니카를 배웠고, 배운 아이들은 지금 다 연주를 잘할 줄 아는데, 그게 증거 아닙니까?"


"그런 거 말고 실제 그날그날 교육했다는 증빙자료가 있어야지. 기록이 생명이라니깐... 앞으로 계속 교사생활해야 하니깐 지금 잘 기억해 둬. 일을 할 때는 꼭 티를 내야 한다는 걸. 사람들은 의외로 남의 일에 관심이 없으니깐 선생님이 뭘 하고 있는지 알게 해야 해."


부장님의 말을 듣고 씩씩 거리며 집에 돌아갔다. 억울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곧 냉정함을 되찾았다. 담당 부장님이 한 말씀을 곱씹어보았다.

'일을 할 때는 티를 낸다.'

 

난 그동안 내가 열심히 일 하는 것을 당연히 남들은 다 알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타인은 생각보다 나에게 무관심했고, 몇몇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말에 의해 한 순간에 나란 사람이 평가가 되었다. 분하지만 부장님의 말씀대로 다음부터 일을 할 때는 티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점심시간, 교실에 하모니카 동아리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얘들아, 그동안 배운 것들을 이제 보여줄 때가 온 것 같아. 미니 공연을 하는 건 어때?"


일주일 간 맹연습 후, 학년에서 미니 공연을 했고 공연 영상을 찍었다. 아이들에게 사전 동의를 받은 후, 유튜브에도 영상을 올렸다. 때마침 내가 방송부 담당이었기에, 하모니카 공연 영상을 본관에 있는 학교 홍보 TV에도 틀 수 있었다.


영상을 튼 지 일주일이 지나자 바로 반응이 왔다.

"선생님, 애들 하모니카 연주하는 거 봤는데 너무 잘하던데요? 언제 그렇게 연습을 시켰대? 정말 멋져요!"


그동안 몰랐거나 관심이 없었던 선생님들이 영상을 보시고 관심을 표해주셨다. 내가 일을 안 하고 책임감 없다는 근거 없는 얘기는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쏙 들어갔다.


'아... 진짜 일을 할 때는 티를 내야 하는구나!'


그 뒤로 내가 하는 일들을 본격적으로 티 내기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께 허락을 받아서, 방송부 아이들과 영상 대회에 나가서 수상한 작품을 전체 인성교육 방송으로 틀기도 했고, 반 아이들과 스마트폰 중독 예방 영상을 만들어 관련 주간 행사 때 전교생 방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잡음도 있었다. 내가 책임감이 없다고 하모니카 동아리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이전 방송부 담당 선생님이었다.

"네가 이렇게 잘해버리면 난 어떻게 되니? 좀 적당히 해. 비교되잖아."


그저 농담인 줄 알았던 그 선생님의 행동은 갈수록 심해졌다.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번엔 방송부 아이들한테까지 와서 뭐라고 했다.

"이번에 만든 영상에서 교통사고 장면은 좀 심하지 않나? 그거 보면 저학년 애들은 트라우마 올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교육영상으로 안 트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 영상으로 이번에 도대회 수상까지 한 방송부 아이들을 칭찬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꾸짖는 모습을 본 나는 이 선생님이 순수한 후배를 위한 마음이 아닌 악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 이후로는 아예 신경을 안 쓰고 더 열심히 교육활동에 매진하기로 했다. 물론 이전에 배운 교훈대로 한 일에 대한 티는 계속 냈다.


몇 달이 지나자 그런 잡음들도 사라졌다. 내가 열정적으로 교육활동을 한다는 사실이 일하는 티를 냄으로써 학교에 알려지자, 많은 선배 교사들이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셨다.

"어쩜 이렇게 멋진 영상을 만들었대? 역시 교실남 선생님은 능력자야!"

"선생님은 신규인데도 신규 같지도 않고, 진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아. 선생님을 보면 예전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거 같아. 반성도 많이 되고.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어. 항상 응원해!"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배운 교훈을 잊지 않고 실천하고 있다. 이제는 이 교훈을 업무뿐만 아니라, 학급 내 교육활동들에도 적용을 시키고 있다. 난 설명이나 안내가 필요한 교육활동이나 아이들의 배움이 많았던 교육활동은 항상 학부모님들에게 사진과 함께 활동 취지와 결과를 설명해 드린다.


경험상 학부모님과의 오해는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대부분 소통의 부재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을 해드리니 오해의 소지가 아예 사라졌고, 오히려 학부모님들의 굳건한 지지와 응원을 받게 되었다. 교육활동은 전과 다름없이 했고, 추가로 설명과 안내만 해드렸을 뿐인데 말이다.


'일을 할 때는 티를 내야 한다.'


단 이 법칙에서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내가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하는 것은 그동안 쌓은 신뢰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 내가 실제로 한 일만 티를 낼 수 있도록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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