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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Jan 02. 2023

[영화 에세이] #23. 원 세컨드

장예모의 모뉴먼트 밸리, 끊임없이 귀환하는 굴레

장예모의 모뉴먼트 밸리, 끊임없이 귀환하는 굴레          


 황량한 사막으로 한 사내가 떠오른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사내는 정처 없이 걷는다. 영화는 그를 뒤쫓아 우리를 어느 마을로 안내하며 그곳에서 사내는 한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필름을 훔쳐 도망가며, 사내는 소녀를 쫓는다. 소녀는 왜 필름을 훔치며, 사내는 왜 그곳으로 갔는가. 그 전에 앞서 사내와 소녀는 왜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는가.


 사내와 소녀가 만나는 장면에 특별히 의문을 가질만한 점은 없으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무언가 이상하다. 류가녀는 제2공장에 소속되어 있는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필름을 훔치기 위하여 자동차 없이는 건너기 힘든 사막길을 건너왔다. 필름은 곧 제2공장으로 도달할 터인데. 사내에게 빼앗긴 필름을 다시금 쟁탈하려 할 때는 얼굴이 보이지 않은 조력자가 등장하기도 하며, 사내는 소녀에게 권총을 겨누기도 한다. 이후 영화에서 조력자는 등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류가녀에게 호의적인 인물도 찾아볼 수 없다. 권총 역시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난 시점에서 의문을 자아내는 요소로 남는다. 그렇다면 왜 영화는 소녀와 사내를 이곳에서 만나게 하였으며, 후에 등장하지 않을 인물과 소품을 등장시켰는가. 질문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질문에 대하여 탐구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만들어낸 세계로 진입해야 한다. <원 세컨드>는 ‘영화를 복원하는 영화’이다. 스크린의 뒤편에서 필름을 물로 닦고 말리며 복구하는 장면은 그림자가 비치면서 그림자극이 상영되는 것처럼도 보이면서 마을의 구성원들을 영화 내부로 끌어들인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이 영화를 복원하려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영화 상영원 ‘판영화’와 농장의 구성원들은 <영웅아녀>를 보기 위해 필름을 복원한다. 반면 사내와 소녀는 필름이 담고 있는 영화에 추호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사내는 영화에 덧붙여진 중국 뉴스 22호에 나오는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필름을 복원하며, 소녀는 동생을 위한 전등갓을 위해 필름을 훔치려 한다.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장예모는 문화대혁명 시대를 들여다보며 ‘영화’를 복원해내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장예모는 ‘어떠한’ 영화를 ‘무엇을 위해’ 복원하려 하는가.

          

영화 <원 세컨드>

1. 서부극과 공간

     

 <원 세컨드>는 서부극을 닮아있다. 황량한 사막의 자태와 무법자로의 주인공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허문영 평론가는 ‘서부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부라는 랜드스케이프, 혹은 존 포드의 모뉴먼트 밸리’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서부의 사내는 모뉴먼트 밸리라는 초월적 공간에서 공동체로 도래해 오이디푸스 궤적을 상대화하고는 다시 그곳으로 떠난다. 장예모가 담습하려 하는 것은 선형적 내러티브와 특징적인 도상으로 표상되는 장르적 통념으로의 서부극이나 서부 개척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건국 신화로의 서부극이 아니다. 어쩌면 <원 세컨드>는 서부극이라기보다 존 포드의 영화를 닮았다고 주장하는 편이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존 웨인은 모뉴먼트 밸리 어디선가 나타난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역마차에 올랐으며, <수색자>에서 이든 에드워즈는 남북전쟁의 전장을 떠나 역광이 드리워진 입구를 통해 집으로 돌아온다. 존 웨인이 떠나온 장소들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고 비가시영역에 머문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부의 사내는 모뉴먼트 밸리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서부에서 등장한 사내처럼 <역마차> 이후 존 포드의 영화는 끊임없이 모뉴먼트 밸리의 주위에서 맴돈다. 이는 영화 내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역마차>에서는 마부와 보안관을 투 쇼트로 비추면서, 거의 동일하게 보이는 쇼트로, 그러나 정반대의 방향성을 가진 쇼트를 반복하며 인물들을 모뉴먼트 밸리를 배회하게끔 만든다.


 <수색자>에서 이든과 마틴은 5년 동안이나 데비를 찾아 헤맸으나 그들 뒤로 비치는 풍경에는 여전히 모뉴먼트 밸리가 서성이고 있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서부의 사내는 모뉴먼트 밸리에서 머무는 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모뉴먼트 밸리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자이다. 갈등을 해결하고 서사를 완수하며 탈출의 여지를 보인 사내는 존 포드의 또 다른 영화에서 다시 모뉴먼트 밸리를 등진 채 기어코 등장하고야 만다.


 <원 세컨드>에서 사내가 도망쳐 나온 곳은 노동교화소이다. 이곳 역시 비가시영역에 머문다. 우리는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사내가 사막에서 불현듯 등장하였음을 확인할 뿐이다. 즉 <원 세컨드>의 모뉴먼트 밸리는 사막이다. 사내는 모뉴먼트 밸리에서 제2 농장이라는 도시로, <원 세컨드>라는 영화의 내부로 향한다. 관측될 수 없는 어떠한 숭고한 영역에서 초월적 거리를 건너온 존재가 서부극으로 들어와 사건을 해결하고 떠나는 것처럼 장예모는 사내가 영화로 들어와 무언가를 구출해내 주기를 고대한다.


 사막은 <원 세컨드>뿐만 아니라 장예모의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장예모의 초기 영화는 사막으로부터 출현한 인물을 고립된 공간으로 밀어 넣으며 이루어진다. <붉은 수수밭>의 도입부에서 추알과 가마꾼 유이찬은 사막을 넘어 수수밭을 지나 양조장으로 향한다. 수수밭과 양조장은 극이 행해지는 무대로 작동되며 역사의 흐름의 한가운데에 놓여진다. <국두>의 도입부는 양금산의 조카 천정이 나귀를 끌고 염색 공장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염색 공장 역시 비극이 행해지는 무대로 작동하여 중국 사회를 제유한다. <홍등>에서는 송련이 진씨 가문의 저택에 도달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저택에서의 비극은 세대를 거듭하며 지속되는 사회의 비극으로 확대된다. 존 포드의 모뉴먼트 밸리가 그렇듯 사막의 모래 역시 시간성을 무력화한다. 사막은 억겹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으로 황량하게 남겨지며 영원성과 지속성을 내포한다. 그렇기에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의 인물들은 무대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며 구속된 공간을 둘러싼 사막을 배회하며 정박한다.


 <원 세컨드>는 과거 자신들의 영화와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시작한다. <원 세컨드> 또한 사막을 건너온 사내가 마을에 도달하는 것으로 막을 연다. 그러나 이전 영화들의 인물들은 타의에 의해 구속된 공간으로 나인(拿引)되었다면, <원 세컨드>의 사내는 자발적으로 그 공간을 향해 진입한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재현 혹은 모방이 아니다. 스스로가 구축해냈던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이다. 장예모는 자신의 영화가 구축했던 ‘구속된 공간’으로 사내를 돌진시키고는 무언가를 복원하고 무언가를 찾아내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그것을 찾은 채 탈출해내기를 고대한다.   

        

영화 <원 세컨드>

2. 장예모의 영화, 장예모의 판타지

    

 초기 영화의 구속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겪는 비극은 가족의 균열로부터 도래한다. <붉은 수수밭>에서는 유이찬이 양조장 주인 리서방을 죽이고 추알을 아내로 맞으며, 그로 인해 양조장에 오래 몸담았던 라호안은 양조장을 떠나게 되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에 마을 사람들은 복수를 감행하고 이 과정에서 추알 역시 사망한다. <국두>의 천청은 국두와 밀애를 나누며 그로 인해 태어난 천백은 천청의 아버지, 양금산을 죽이게 된다. 후에 천청과 국두의 밀애를 알게 된 천백은 천청마저 살해한다. <홍등>에서의 송련은 부인들의 시기와 모략을 겪다가 실언으로 인해 세 번째 부인을 죽게끔 하였으며 그로 인해 실성하고 만다.


 비극은 붉은 공간에서 개화한다. <붉은 수수밭>의 붉은 수수는 붉은색의 고량주로 변모하여 양조장 곳곳에 뿌려지며, 결말에 이르러 수수밭은 뿌려진 피와 햇빛으로 물든다. <붉은 수수밭>의 고량주와 피는 <국두>의 염색약으로 연속된다. 염색 공장은 붉은 천으로 휘감겨있으며 양금산과 천청은 붉은 염색약에 허우적대며 죽음을 맞이한다. <국두>의 붉은 천은 <홍등>의 저택 내부로 들어와 인물들을 붉게 밝힌다. 말하자면 붉은색은 그의 초기 영화에서 공간을 점유하며 통일성을 부여하고, 그로써 시대를 거듭해나가며 종(種)의 비극의 계보로 환유 된다.


 <귀주 이야기>를 거치며 개인의 비극은 축소되며 장예모의 붉은 공간은 옅어진다. 개인이 겪는 비극은 고작 남편이 당한 폭행에 대해 사과를 받지 못하는 것이거나(<귀주 이야기>) 가난하고 어린 여선생이 10위안을 위해 사라진 아이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그친다(<책상 서랍 속의 동화>). 이들의 비극에서 붉은색으로 점철된 공간은 찾아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구속된 공간 또한 사라진다. 혹은 구속된 공간을 그려낸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아로새긴 아름다운 공간으로 그려지곤 한다. 장예모는 문제의식을 시골에서 도시로 확장하며 더 큰 공동체를 겨누는 듯하나 공동체의 균열과 아이러니는 영화적으로 봉합된다. 갈등은 난산을 겪는 산모를 병원까지 이송해내거나(<귀주 이야기>), 국장 개인의 선량함과 학용품 지원으로 공동체를 재결합하거나(<책상 서랍 속의 동화>),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수업을 하며 부모를 이해하는 아들을 그려내며(<집으로 가는 길>)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귀주 이야기>에서는 촌장이 구속되며 공동체의 온전한 봉합은 숙제로 남았으나 <책상 서랍 속의 동화>에서는 기어코 극적으로 공동체를 봉합해낸다. 이는 기만이고 은폐이며 동화적 환영일 뿐이다. 고작 개인의 도덕과 도시 사람들의 경제적 지원으로 아이들이 선생을 따르게 되는 것, 그로써 공동체가 재결합하게 되는 것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해결되지 못한다. 선생이 10위안을 위하여 재능있는 아이의 기회를 박탈하려 하고, 떠난 아이를 찾기 위하여 학생들의 돈을 걷고 노동을 강요하거나, 촌장은 아이들의 돈을 떼먹으며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하여 도시로 떠나버린 아이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시스템에 대해서는 눈감을 뿐이다. 아버지의 장례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아버지를 승계하는 이야기(<집으로 가는 길>) 역시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가족 내 문제에 그치면서 비판의 칼날은 무뎌진다.


 장예모는 동화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무협영화로 눈을 돌린다. 이는 아마도 단순히 체제와 상업영화의 결탁은 아닐 것이다. 서부극이 미국의 기원이라면 무협영화는 중국의 기원이다. 무협영화는 현대의 중국을 은폐하고 과거의 중국을 소환한다. 장예모는 무협영화를 통해 비극 이전의 시대를 회고하며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비극을 극복해보려 하는 것이다. 무협영화는 인물의 무용담이자 영웅의 전기영화이다. 그들의 업적은 현실로는 불가능한 무공의 경지로부터 기인하며, 무협영화는 영웅이라는 비범한 인물의 힘으로 중국의 위대했던 풍광을 담아내고 신화를 건설하려 한다. 그러한 점에서 <영웅: 천하의 시작>은 철저하게 신화를 위한 이야기이다. 진시황을 살해하려던 인물들의 검은 진시황을 베지 못한다. 개인의 복수, 조국의 비극은 더 큰 조국을 위한 대의를 위해 희생되고 봉합된다. 사막에 등장한 무협의 인물들은 더 위대한 영웅을 위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영화적 봉합은 현실의 봉합을 가져오지 못한다. 영화의 통합과 질서, 화해와 협력으로 현실의 문제는 억압되고 봉합을 위한 시도는 결국 이데올로기적 은폐에 머무른다. 장예모가 세우려는 신화는 <원 세컨드>에서 복원해낸 <영웅아녀(英雄兒女)>처럼 체제의 존속을 위해서 기능할 뿐이며 제국주의적 환영을 담아낼 뿐이다.


 무협영화에 몰두하던 그는 어느 순간 다시 돌아온다. 다시 문화대혁명 시기를 돌아보기도(<산사나무 아래>, <5일의 마중>) 때론 도쿄로 향하기도 하며(<천리주단기>), 난징 대학살을 되짚으며 영웅 서사와 공동체의 유대를 동시에 꾀하기도 한다(<진링의 13소녀>). 그러다가도 문득 떠난다. 그의 영화는 무협의 신화와 비극의 공간 사이의 간극에서 배회한다. 이 지점에서 장예모는 <원 세컨드>로 멈춰서서 되돌아본다. 장예모가 문화대혁명 시대에 협동농장에서 꺼내 오고 싶었던 것은 사내가 찾던 ‘원 세컨드’일 테다. 장엄한 제례 의식처럼 복원을 위해 떠나는 필름의 와상(臥像)도, 보고 배워야 할 선전으로의 모습도 아닌, 자신의 영화가 찾아내야 할 순간을 수색한다. <원 세컨드>의 사내는 장예모가 구축하였던 공간을 향해 진입하여, 그곳에서 역사의 폭력에 희생당한 개인의 비극을 어루만질 무언가를 찾기 위해 선전 영화를 복원해내고, 그곳에서 공동체의 유대를 겪으나 사막을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공간으로 귀환한다. 그러니까 <원 세컨드>는 <붉은 수수밭>, <국두>와 <홍등>에서 시작해서 <영웅>, <연인>, <황후화>로 표상되는 무협영화를 거쳐 <귀주야이기>와 <인생>, 혹은 <산시나무 아래에서>와 <5일의 마중>으로 돌아오는 영화다. 장예모의 영화는 판타지의 공간과 모뉴먼트 밸리 사이에서 진동한다.

         

영화 <원 세컨드>

3. 오해와 배려  

   

 앞서 <원 세컨드>는 장예모의 초기 영화와 같은 지점에서 시작한다고 하였다. 허나 사내는 곧바로 구속된 공간으로 발을 들이지 않고 잉여적 공간을 거쳐 필름을 훔치는 류가녀와 조우한 후에야 제2 농장으로 진입한다. 영화는 사내와 소녀에게 ‘오해와 오인’이라는 서사의 굴레를 덧씌운다. 사내는 소녀를 남자로 착각하고, 필름을 팔기 위해서 훔치는 것으로 오인하며, 소녀를 위해 싸우는 동안 소녀가 필름을 들고 도망간 것으로 오해한다. 두 인물 간의 오해는 배려를 통해 한 꺼풀씩 벗겨지는데, 배려의 순간마다 사내는 위기를 맞이한다. 소녀가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며, 뒤따라오는 소녀에게 배추를 던져주었으나 마침 그 위치에 있던 동물의 뼈를 발견한 소녀는 사내를 가격하고, 소녀가 필름을 훔쳤다는 사실을 판영화에게 고발하지 않고 함구하나 이로 인해 사내는 보안과에 잡혀갈 위기에 처한다. 소녀를 사내로 오인한 보안과들로부터 소녀를 구해내기 위해 영화관으로 다시 돌격하였으나 꼼짝없이 붙잡히고 만다. 그는 오해와 배려의 순간들로 인해 ‘원 세컨드’를 손에 넣지 못하고 끊임없이 농장으로 되돌아온다.


 끊임없이 재소환되는 세계와 초월의 영원에서 약간의 희망이 주어지는 순간들은 개인사의 유대에서 온다. 사내와 소녀는 필름을 쟁탈하는 초입에서 서로를 자신의 아버지와 딸이라고 칭하며, 후에 이들은 서로에게 읊었던 이야기가 실제였음을 알게 되고 결말에 이르러 딸을 상실한 아버지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은 가족 공동체의 양태로 재결합된다. 다시 말해 거짓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진짜 가족이 되면서 영화는 봉합된다. 영화적 봉합에 동원되는 이는 사내와 소녀뿐만이 아니다. 사내가 장예모가 자신의 세계로 보낸 사절(使節)이라면, 사절은 류가녀를 경유하여 판영화에 이른다. 판영화는 소녀에게 전등갓을, 사내에게 딸의 모습이 담긴 두 프레임의 필름을 건네주면서 영화의 갈등은 해소의 국면을 맞이한다. 아버지의 부재에 놓인 소녀와 딸을 상실한 사내, 영화를 복원하기 위한 세정액으로 아들을 망친 판영화와 딸의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영화를 복원하는 사내. 당신이 날 오해했다고 말하라는 소녀의 대사처럼 소통을 통해 개인이 가진 아픔을 이해하는 순간으로 희망의 실마리를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봉합을 위한 장예모의 영화적 시도는 다시 실패로 회귀한다. 오해는 해소되지 않고 끝까지 영화를 물고 늘어진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모뉴먼트 밸리를 선회하는 인물들의 운동이 마치 뚜렷한 방향성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역마차>에서는 로즈버그의 존재이며, 국경 너머의 장소이고, <수색자>에서는 조카딸이 죽지 않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브라조스 강의 세븐 핑거즈이다. 희망의 목적지라는 존재는 인물들의 원형 운동을 선형 운동으로 왜곡한다. 영화는 인물들을 그곳으로 떠나보내며 모뉴먼트 밸리를 등지고 그들을 배웅할 수 있다. 허나 원 세컨드의 사내는 다시 회귀한다. 사내가 사막을 건너 도달하는 곳은, 로즈버그나 국경 너머의 장소 혹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머무는 장소 등이 아니다. 사내는 그가 도망쳐 나온 노동교화소로 되돌아가며, ‘원 세컨드’를 분실한 채 떠나버린 그의 랜드스케이프는 숭고함을 상실한다. 사내에게 희망의 공간은 사막 너머의 영역이 아닌, 다시 제2 농장, 장예모의 세계이다. 혹은 소녀가 필름 조각을 주웠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오해와 오인의 공간이다.


 필름 조각이 버려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 소녀는, 사내가 놓친 것이 필름이 아닌 필름을 싼 신문지인 줄로만 알았다. 2년 뒤 재회한 사내와 소녀가 신문지를 펼쳤을 때 드러나는 허공은 황량한 사막처럼 허망하다. 소녀의 배려는 오인으로 인해 무력해진다. 다시금 필름 조각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나선 그들은 황망한 지평에 덩그러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숭고함이 결여된 모뉴먼트 밸리와 세계의 질서 사이의 거리감은 아득하기만 하다.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영화는 소녀와 사내를 제2 농장의 밖에서 만나게 하였으며, 소녀의 조력자와 권총은 왜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는가. 영화는 오해의 서사를 영화 내부에서만 머무르길 원치 않는다. 장예모의 역사를 아우르는 사막, 말하자면 초월성과 무력화된 시간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부터 오해는 드리워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내와 소녀가 같이 사막을 건너야 한다. 조력자와 권총이 다시 등장하리라는 약속과 믿음 또한 오해로 작동한다. <원 세컨드>는 베를린 국제영화제 상영 직전 철회되어 중국 정부의 검열에 대한 의혹을 낳았다. 조력자와 권총이 등장하지 않은 것이 자의적 선택인지 타의적 강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텍스트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영화를 구출하는 과업에 실패하며 역설적으로 사건의 주제는 강화된다. 이를테면 자의적 혹은 타의적 결과물로서의 이 영화는 결국 오해로 덧칠된 서사이자 거짓으로 이루어진 형식이라는 것.


 그리하여 사내는 ‘원 세컨드’를 찾지 못하며 형식은 온전한 형태로 끝맺지 못한다. 그러니까 <원 세컨드>는 비록 사내는 딸의 얼굴을 보았고 소녀는 전등갓을 얻었음에도, 아무것도 완수해내지 못하고 오해와 배려의 상흔만 남겨놓은 영화다. 이해와 협력으로 공동체를 봉합하려는, 혹은 영웅 서사와 신화의 건설로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다시금 과거를 복기하며 봉합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영화적 시도는 결국 무(無)로 돌아가고 육중한 현실의 무게와 황량한 공허감이 드리운 서사이다. 이러한 결말은 어쩌면 사내와 소녀가 마주한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었을 테다. ‘오해’의 서사는 끝까지 영화를 붙잡으며 ‘원 세컨드’를 사막의 지층으로 가라앉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엔딩 장면에서 그들의 미소를 보게 된다. 사라진 필름 조각을 찾지 못해 모래에 헛발질하는 사내를 보고 소녀는 웃고, 소녀의 미소를 바라본 사내 역시 웃음 짓는다. 결국 돌고 돌아 사막으로 귀환하였음에도 그들이 웃을 수 있는 것은 ‘원 세컨드’를 시간의 지층 속에 묻어 넣고 새로이 도약해내려는 결의일까, 단지 허구적 봉합을 위한 만착(瞞着)일까. 잃어버린 두 프레임의 필름처럼 <원 세컨드>의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순간들을 영화 너머 짐작해보며, 우리는 웃거나 웃지 않으며 그들의 미소에 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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