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한 알

by 이경종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입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과학자는 우주의 한 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시인은 시간의 한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느낀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대추 한알로부터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른 거죠. 우리는 붉은 대추가 익어 있는 풍경만을 봅니다. 결과를 만들어낸 인고의 시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대추 한알이 그냥 쉽게 익는 것이 아닙니다.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날...제대로 여물기 위해서는 숙성과 담금질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인간만이, 자신만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만유인력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 가을이 왔기 때문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봄이 옵니다.

우리는 저절로 가을이 오고 봄이 온다고 생각하지만, 뜨거운 여름이 있었기에 결실의 가을이 오고, 차가운 겨울이 있었기에 생명이 움트는 봄이 올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계절에 서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올 것이고, 겨울을 버티면 봄이 찾아올 것입니다.

계절은 순환하지만 대추 한알이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시간들을 온전히 살아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