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편지
<어린 왕자>에서 특급 조연 여우(No 여배우, Fox)는 어린 왕자에게 친구가 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우는 말을 멈칫하며 어린 왕자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제발.... 나를 길들여줘!"라고 여우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라고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별로 없어. 친구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사귀어야 하거든."
"인간은 자기가 길들이는 것만 알게 되는 거야."
여우가 말했다.
"인간들은 뭔가를 사귈 시간이 없어. 그들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들을 가게에서 사거든. 그러나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어. 만약 네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린 왕자가 물었다.
"참을성이 많아야 해."
여우가 말했다.
"일단 내게서 조금 떨어진 풀밭으로 가서 앉아. 나는 너를 곁눈질로 몰래 조금씩 훔쳐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마. 말이란 오해의 원인이 되거든. 그런 다음 너는 날마다 내게로 조금씩 다가오는 거야."
참 여우랑 친해지기 쉽지 않네요. 여우가 친해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설명해놓은 것을 보면, '보는 과정'이 있습니다. 보아야 보이거든요. 얘가 내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아닐지 말입니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한 말이죠. 왜 이런 당연한 말을 하고 있냐 하면, 우리는 우리가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보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여 이 세상을 살고 있거든요. 초고속 인터넷 시대, 비행기만 타면 전세계 어디라도 하루만에 갈 수 있는 지구촌 글로벌 시대, 우리는 옛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SNS로 수많은 사람들을 팔로우합니다. 이동에 한계가 있었던 구석기시대의 원시인과 비교하면 인간관계의 규모는 분명 더 커졌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고 알고 있다고 믿는 이들중에 실제 자신의 관계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분명 보고 있어도 진짜 보지 못한 수많은 관계들이 존재할 겁니다.
꽃은 우리가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꽃이 아닙니다. TV에 나오는 헐벗고 굶주린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은 머릿속의 관념일 뿐입니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아이들입니다.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맹자>에 보면 맹자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군주인 제선왕과 불인인지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루는 제선왕이 대전에 앉아있는데,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습니다. 왕이 그것을 보고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혼종(제물)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선왕은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 그러면 혼종 의식을 폐지할까요?"라고 하자, 왕은 "혼종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나 양이나 뭐가 다른 것이냐고 제선왕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 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께서 하신 일이 바로 인仁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남을 의미하고, 만남은 관계가 형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은 그냥 남일뿐입니다. 얼핏 스치고 지나쳐서 내 눈앞으로 지나갔다고 해서 본 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칠 때 인사라도 한다면 그때가 진짜 처음 본 순간입니다. 그 순간 남이 아닌 이웃사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계속 마주치고 인사 하다 보면, 언젠가는 좀 더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누기도 하겠죠. 그러다 보면 동네호프에서 맥주라도 한잔 하게 되고, 더 친해지면 말 그대로 이웃사촌이 되겠죠.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그 관심의 시작은 '진짜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