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벚꽃속에서
두달전의 일이다. 일요일 오전 후배로부터 카톡이 왔다.
2020년 2월 2일 2시 22분. 그럴듯했다.
속는셈 치고 로또 맞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아직까지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후 2시 22분이 아니라 새벽 2시 22분에 소원을 빌었어야 했다는 뒤늦은 깨달음...오후 2시 22분은 14시 22분이 아니던가...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인간이 만든 달력과 시간에 맞춰서 천기가 운용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유독 날짜와 시간에 집착을 한다. 그 덕분에 빼빼로가 팔려나가고, 1월1일만 되면 일출명소에 사람들이 몰린다. 외부적인 조건과 사건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특정한 시간과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내면과 존재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고 가지려는 존재다. 혹시 찾고 있는 그 의미가 지금의 삶과 동떨어진 파랑새는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온 등장인물 레빈의 독백이 떠오른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레빈은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어 절망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자문하는 것을 그쳤을때는 마치 자기가 무엇이고 무엇때문에 사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소설 <알레프>에서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책상머리에 앉아 삶의 의미와 고난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아파트 화단의 벚꽃이라도 보러 나가야겠다.
양말을 신으면서, 시계를 보니 지금 시각이 오후 2시 39분이다.
보통 직장에서 오후에 한창 일을 하다가 시간을 보면 매번 재수없게 4시 44분인 경우가 많다.
그 재수없는 4시 44분이 왠지 오늘은 의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내 나이가 44살이여서인듯.
좀 있다 오후 4시 44분이 되면, 한번 소원을 빌어볼까?
아뿔싸...
새벽 4시 44분에 했어야 했구나.
2031년 5월 5일 새벽 5시 55분에 알람을 맞춰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