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편지
"우리는 무익한 것에서 생명을 얻고 유익한 일을 하면서 탈진한다. 유익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는 파멸하고 죽게될 것이다."
이탈리아의 작가 조지오 망가넬리가 한 말이라고 하네요.
유익한 일은 말 그대로 '일'입니다. work죠. 기정의된 미래의 가치를 만드는 활동입니다. 목표달성여부, 즉 결과가 과정을 압도합니다. 수험생이라면 고득점을 위한 공부일테고, 회사원에게는 다음달 급여를 받기 위한 업무가 될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에게는 실전에서의 성공을 위한 고된 훈련이 될테구요. 프로젝트는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두 가지 결과 이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마음편지에서도 말씀드렸던 '키네시스(kinesis)'적 활동이죠.
무익한 것들은 뭘까요? 유익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이겠죠. 노는 일입니다. 일견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들이지만, 우리는 놀고 휴식하면서 에너지를 충전합니다. 무익한 것들로부터 유익한 일들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익한 것들은 대부분 과정지향적입니다. 결과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휴가를 다녀와서 '잘 쉬었다'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총합인 겁니다. '키네시스'의 대척점에 있는 '에네르게이아(Energeia)적 활동인 셈입니다.
태풍 카눈이 오기전 정말 폭염이였죠. 작열하는 태양과 시원한 바다가 부르는 피서의 계절이 이제 지나가고 있는 듯 합니다. 아직 휴가를 다녀오지 않은 분이라면 휴가기간동안 얼마나 잘 무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듯 합니다.
저는 수년전에 아주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던 적이 있습니다. 3년 넘게 지독하게 불면증을 앓았는데요. 이게 심각해지니 우울증도 오고 악순환이 되더군요. 모든 것이 암울했던 시기였고, 빠져나오기 위해 말 그대로 발버둥을 쳤던 것 같습니다. 회사에 사정을 얘기하고 쉬기도 했고, 아침에 햇볕을 쬐면서 운동과 치료를 하기 위해 나홀로 근무시간을 조정하기도 했습니다. 휴식을 취하고 있어도 몸은 늘 각성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오히려 더 안좋아지더군요. 그래서 여러가지 활동을 했습니다. 규칙적인 산책, 명상, 국선도, 단전호흡, 조깅 등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정신과치료와 더불어 온갖 약들과 건강식품은 기본이였습니다. 심신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이상 그 상태를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습니다. 제 경우는 아주 조금씩 조금씩 좋아졌던 것 같습니다.
되돌아보건데, 그당시 제가 취했던 휴식과 충전의 활동들에는 강박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휴식을 취해야 한다,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던 겁니다. 긴장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더 긴장되기 마련이죠. '무엇을 해야만 한다'라는 것은 '키네시스'입니다. 여러분은 한번 이상은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치과치료를 받을 때 누워있을 때 어떻던가요? 긴장을 풀려고 애쓰지만, 몸은 계속 경직상태에 있죠. '몸에 힘을 풀어도 돼'라고 이성은 이야기하지만 심신의 나머지 부분은 그 말에 결코 동조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치과치료라는 것은 끔찍할 수 밖에 없습니다.
휴가와 휴식 역시 마찬가지일 듯 합니다. 무익함에 유익함을 더하려는 욕심을 버리면 더 잘 쉴 수 있습니다. 휴가와 휴식을 유익함으로 채우려는 노력은 강박을 만들어냅니다. 레저(leisure)는 라틴어의 리케레(licere)로부터 파생된 단어라고 합니다. 리케레는 "허락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휴가와 여가라는 것은 허락된 것들이라는 겁니다. 일의 부속활동이라는 거죠. 일을 멈출수 있는 시간을 줄테니 허락된 그 시간을 잘 써보라는 겁니다. 아무일도 하지 않도록 허락된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서 우리는 그 시간들에 많을 것들을 채워 넣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구본형 선생님이 <떠남과 만남>에서 한 이야기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우리의 놀이가 밤이 깊어질수록 야단스러워지는 이유는 어쩌다 한번 쉬기 때문이다. 휴식의 절대 길이가 짧다보니, 당연히 볼 것도 해야 할 일들도 많다. (...) 다시 일로 복귀해야 할 날까지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이다. 휴식이 휴식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는 우리의 휴식 시간이 짧다는 것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짧게 끊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 소비 문화일 수밖에 없다. 자유 시간이 턱없이 짧기에 클라이맥스는 빨리 맛보아야 한다. 뜸을 들일 시간이 없다. (...) 그래서 모처럼의 휴식은 또 다른 노동이 되고 만다."
<떠남과 만남> 212쪽
진정한 휴식은 어떠한 평가나 판단을 더하지 않고 단지 지금 여기의 경험에 능동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정의이기도 합니다. '에네르게이아'입니다. 무익한지 유익한지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 그 순간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현존입니다. 적어도 휴가와 휴식의 시간만큼은 성공의 가치를 적용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진정한 휴식은 성공이라는 결과가 아닌 행복이라는 과정을 가져다주는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