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 좋아하시나요?
꼭 운동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는 자주 걷습니다. 생각이 정리가 안되거나 골치가 아픈 일이 있을 때 무작정 나가서 가급적 인적이 드문 산책로를 걷곤 합니다. 사실 도심에서 인적이 드문 곳을 찾기는 어렵죠. 거의 모든 길은 차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원 역시 사람들이 많아서 걸을 때 주위에 정신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생각에 잠기기 쉽지 않습니다. 운동이 목적이라면 괜찮겠죠.
혼자 가만히 있을 때 생각 정리가 안되는 것은 요즘 부쩍 더 심해진 듯 합니다. 현대인의 특성이기도 하죠. 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 합니다. 현대인의 일상에는 항상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을지 모른다는 강박이 숨어있습니다. 홀로 고요히 앉아서 사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인적이 드문 길을 걸을 때 왜 생각 정리가 잘 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일단 걸을 때 일부러 생각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머릿속에 이미 이런저런 생각들이 꽉 차 있지만, 어떤 생각에게도 주도권을 강제로 주지는 않는거죠. 그럼 생각이라는 것들이 그냥 자기가 알아서 올라왔다가 내려갔다를 반복합니다. 떠오름과 사라짐을 반복하던 생각들이 자체적으로 갈무리가 되곤 합니다. 몽테뉴는 <수상록> 에서 앉아 있으면 생각들이 잠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생각이란 것을 아이디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고 굳어있는 상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리가 흔들어주지 않으면 생각들은 제 갈길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도 걷기는 몸과 마음에 최소한의 자극을 주는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을 천천히 흔들어서 깨우는 거죠. 빨리 걷거나 뛰게 되면 몸으로 그 균형추가 기울어지게 됩니다. 거꾸로 걷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생각들이 꽉 막혀 있게 됩니다. 생각의 정리뿐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와 영감 역시 걸으면서 많이 얻게 됩니다. 저는 걷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스마트폰에 녹음을 하곤 합니다. 녹음했다는 사실을 까먹을 때가 많아서 사실 별 효용은 없는 편입니다.
걷기를 예찬한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은 참 많습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나는 걸으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영화배우 하정우도 걷기예찬론자로 유명합니다. 걷기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죠. 그에 책에서 발췌한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루틴이란 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얼마나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났든 간에 일단 무조건 따르고 보는 것이다. 고민과 번뇌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전에 묶어두는 동아줄 같은 것이다. ..... 루틴의 힘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에 결정적인 문제가 닥친 때일수록 생각의 덩치를 키우지 말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살다보면 그냥 놔둬야 풀리는 문제들이 있다. 어쩌면 인생에는 내가 굳이 휘젖지 말고 가만히 두고 봐야 할 문제가 80퍼센트 이상인지도 모른다. 조바심이 나더라도 참아야 한다......나는 생각들을 이어가다가 지금 당장 답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 그냥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는 편이다. .....시간이 필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당장 해결하고 싶은 조급함 때문에 좀처럼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어쩌면 그 순간 우리는 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질질 끌려가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답이 없을 때는 나는 그저 걸었다. 생각이 똑같은 길을 맴돌 때는 두 다리로 직접 걸어나가는 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오늘도 기도하듯 다짐하듯 말해본다. 힘들다. 걸어야겠다."
<걷는 사람 > - 하정우
걸으면서 정리되는 생각들은 대부분 수학공식이나 영어단어암기처럼 집중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저자 대니얼 카너먼은 뇌의 체계가 시스템1과 시스템2로 나뉜다고 설명합니다. 친구와 걸으면서 23 곱하기 47을 물어보면 십중팔구 친구는 걸음을 멈추고 계산을 하게 됩니다. 시스템 1이 작동한 것이지요. 그에 반해 우리가 걸을 때 생각이 정리되고 사색이 깊어진다면 그건 시스템 2가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직관적인 영역이죠.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산책은 옳고 그름을 밝히는 '수렴적 사고'에는 큰 효과가 없지만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확산적 사고'에는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하지만 걷기 자체를 문제 해결에 사용한다거나 수단으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걷기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건강과 같이 걷기를 통해 얻고자 하는 구체적인 목적이 없거나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없이 마냥 걷는다는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단순히 시간을 버리는 행위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비드 르 브르통은 그의 산문집 <걷기 예찬>에서 걷는다는 것은 지극히 본질적인 것에만 이 세계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걷기는 시간을 버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우아하게 잃는 일입니다. 핵심은 단조로워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길이라도 상황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른 길이 됩니다. 물리적으로 지리적으로 같은 길이라 할지라도, 힘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며 집으로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길과, 한가로운 일상속에서 여유있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길은 서로 다른 길입니다. 길이라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다비드 르 브르통은 길은 몸에 의한 일종의 적응과정이며, 심리학 혹은 정서적 지리학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그 길의 끝에 있는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하는 길과 길 자체가 목적인 길이 있습니다. 걷기를 예찬할 수 있는 길은 후자의 길이겠죠. 사실 전자는 길이 아닌 도로에 가깝겠죠. 고속도로면 더 좋습니다. 본인의 두 발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빨리만 가면 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