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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종 Jan 08. 2019

#55 출장 영어 한마디

미국 LA, 1만시간의 법칙과 서바이벌 잉글리쉬

윤봉준 수석(연구원)은 영어를 굉장히 잘한다. 발음은 구리지만 외국 엔지니어와의 의사소통에 거침이 없다. 이 능력은 외국 엔지니어들과의 컨퍼런스콜(conference call, 전화회의)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상대방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음성 언어로만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전화회의는 많은 개발자들에게 고역이다. 특히 상대방이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지 않는 인도 엔지니어들인 경우 그 고역은 더 심해진다. 출장을 가서 직접 대면하게 되면 만국 공통어인 손짓발짓과 눈빛으로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전화는 오직 음성만으로 모든 소통이 이루어지니, 영어 실력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많은 개발자들에게 영어는 숙명과도 같은 존재다. 연말 고과 평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항목이 어학능력이다. 공인시험점수로든 실전영어든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개발자의 가치는 한단계 하락할 수 밖에 없다. 초기 신입사원 시절 윤수석과 함께 미국 LA로 출장을 갈 기회가 있었다. 그날도 고객사와의 기술미팅을 현란한 영어실력으로 마치고 나온 윤수석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영어를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할 수 있냐고 말이다. 윤수석은 학창 시절 어학연수는 커녕 흔하디 흔한 배낭여행 한번 가본적 없다 했다. 입사합격선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토익시험점수만이 그가 가지고 있던 영어능력이었고, 그도 신입사원 시절 나와 마찬가지로 회화는 한마디 하기도 힘들었다고 했다. 그가 내 질문에 답한 한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서바이벌 잉글리쉬(Survival English)!"


그의 영어실력을 만든 것은 오직 긴 출장동안 살아남기 위해 익힌 실전 영어경험이었다. 개발자들은 통상 한 곳에서 자리잡고 기술적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사실 의사소통을 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기술적인 의사소통은 전문기술용어만 잘 알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므로, 영어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는 개발자나 개발직군 역시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비롯한 회화능력은 여전히 개발자의 전문성을 가늠하는 한가지 척도로 사용된다. 그리고 출장에 있어 현지인들과의 업무적 의사소통이 업무의 성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홀로 출장을 가서 현지 엔지니어나 제품 인증 담당자와 의견 조율을 해야 하는 상황은 햇병아리 시절 내겐 두려운 경험이었다. 독일로 인증 관련 출장을 갔을 때는 예상 가능한 모든 대화의 문장을 미리 A4지 한장 가득 적어 놓고, 현지 직원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개발자로서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이후에도 영어는 늘 나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미국 LA의 한 고객사와 공동개발을 위해 고객 회사의 사무실을 찾은 어느 날, 난 베트남 출신 현지 개발자인 마이크의 알아듣기 힘든 영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방 한구석에 책상을 들여놓고 그와 함께 제품에 탑재되는 소프트웨어의 한 부분인 부트로더(Bootloader)를 개발했다. 알아듣기 힘든 그의 영어를 내 속에서 다시 되새김질하며 뒤늦게서야 그가 했던 얘기들을 이해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그의 억양과 어투에 익숙해졌고, 한달 정도 지나자 난 그와 영어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두달 정도 지나자 엘리베이터에서 웃기지도 않는 미국식 농담을 건네는 현지 개발자들을 마주쳐도 움츠려들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윤수석이 말했던 서바이벌 잉글리쉬를 몸소 맛볼수 있는 시간이었다.


미국 현지에서의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되돌아오자 나의 영어 실력은 리셋되었다. 몇 달후 다시 같은 LA의 고객사를 찾았을 때 난 다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벙어리 냉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다시 긴장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럭저럭 의사소통을 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냥 영어로 쏼라쏼라 하는 오디오나 영화를 틀어놓는다고 영어가 들리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단지 경험만으로 실력은 늘어나지 않는다.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수적이다. 보통 한 분야에서 전문가의 실력을 쌓으려면 1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1만시간의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무리 투자한 시간이 많다 해도 모든 이들이 만렙(滿 Level)에 도달하지는 못 한다. 대부분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면 발전이 멈추게 된다. 경험이 오래된 노회한 개발자들보다 일을 잘하는 신참 개발자들이 있고, 나이가 많은 의사보다 진료를 잘 보고 수술을 잘 하는 젊은 의사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운전이 몸에 익숙해져서, 의식적으로 신경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운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통상 그 지점에서 더이상의 발전은 진행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운전을 하면 운전실력이 계속 향상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의식적인 심층 연습만이 그 이상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스웨덴의 저명한 심리학자 안데르스 에릭슨은 그의 저서 <1만시간의 재발견>에서 이런 심층적인 훈련과정과 1만 시간의 법칙으로 대변되는 장기간의 반복만이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만들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얘기대로 자신이 편안함을 느끼는 컴포트 존(Comport Zone)에서 벗어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지 않으면, 특정지점에 도달한 이후에는 어떠한 향상도 기대할 수 없다. 구기종목에서 공이 제일 잘 맞는 지점을 스위트 스팟(sweet spot)이라 하는데 마찬가지로 우리의 뇌도 스스로 가장 편하게 느끼는 컴포트 존 밖으로 밀어내긴 하지만 너무 밀어내지는 않는 최적의 지점이 존재한다. 이 스위트 스팟은 본인의 능력과 도달해야 할 목표 간의 격차가 가장 작은 지점이다. 이 최적의 스위트 스팟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실력을 향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본인이 다소 불편하다고 느끼게 되는 지점을 찾아 그 지점이 편안하고 익숙해질 때까지 의식적으로 훈련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또다른 책 <탤런트 코드>의 저자 대니얼 코일은 심층연습을 통해 우리의 뇌안에 존재하는 미엘린이라는 물질을 증가시킬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것은 없으며, 진짜 천부적인 것은 수학, 음악, 스포츠 등 어떤 회로든지 간에 신호가 발사된 회로에 분주히 미엘린이라는 절연물질을 감싸는 작은 광대역 설치자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재능과 실력이 향상되는 이론과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모든 동작, 사고, 감정은 신경섬유 회로인 뉴런 사슬을 통해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이동하는 미세한 전기신호이다. 둘째 미엘린은 그러한 신경섬유를 감싸고 있는 절연 물질로서 신호의 강도, 속도, 정확도를 증가시킨다. 셋째 특정한 회로에 신호가 많이 발사될수록 미엘린은 해당 회로를 더 완벽하게 최적화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하는 동작과 사고의 강도, 속도, 정확도는 더욱 향상된다. 대니얼 코일은 말한다.


"연습만으로 완벽해질 수 없다. 완벽한 연습을 해야 완벽해진다."


 두 책 모두 요지는 분명하다. 1만시간의 노력에 의식적이고 심층적인 훈련이 결합되어야만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똑같은 일을 10년동안 반복한다고 해서 모두 달인이 되지 않는다. 오랜 노력에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면 다른 방법을 쓰는게 상식이다. 어제와 똑같은 방법으로 다른 결과를 얻을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1년의 경험을 10년 동안 반복하고 있는 사람들 천지다. 진정으로 나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 탓은 이제 그만 하고 작은 변화부터 시도해봐야 한다. 


사실 제대로 된 영어실력이라고 하기 민망하지만, 그나마 지금의 영어실력은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다. 그것은 학원을 다니며 투자한 시간의 결과보다는 현지에서 실제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좌절하며 몸으로 체득한 기술이다. 여전히 영어가 두렵다. 전화회의를 들어가서 이해하기 어려운 인도 개발자의 영어를 듣는 것이 두렵고, 기술 미팅에서 잘못된 영어구사로 정보를 잘못 전달할까 무섭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만큼 영어공부에 매달리지는 않는다. 여전히 모자란 실력이지만, 그동안의 노력의 결과를 보면 투입 대비 실력의 증진이 현저히 낮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십여년의 의식적인 노력은 내가 어학에 그다지 소질이 없음을 확실히 알게 해주었다.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되는 수준이지만 좀 문제도 있고, 어려움도 있는 지금의 수준을 한단계 더 끌어올리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보다는 더 적은 노력으로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들 - 그리고 내가 영어보다 좋아하는 일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노력하고자 하는 그 일에 대한 이유다.  왜 그 분야에서 달인이 되고자 하는가? 당신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명확히 대답할 수 없다면 1만시간은 커녕 100시간도 지속하기 어렵다. 투자하는 시간과 훈련방법은 부차적인 것이다. 목적에 대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속할 수 없다. 내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이 내면의 진정한 부름으로부터 온 것인지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인내와 의지로는 오래 갈 수 없다. 특정 분야의 일을 오래 하게 되면 주위에서 전문가 소리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진정한 전문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오랜 시간을 심층적인 학습과 훈련으로 채워야 한다. 그 이전에 심층적인 학습과 훈련을 할 수 있는 명확한 동기를 가져야만 한다.


영어에 대한 내 자세도 다르지 않다.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인고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 개발업무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근본적인 중요성은 생각보다는 크지 않다. 십 몇년간 영어에 시달렸지만, 그 시달림의 시간의 대부분은 내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공포였을 뿐이었다. 실제로 영어 때문에 고생한 경험은 몇번 되지 않는다. 십 몇년간 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의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업무에서 영어와 같은 외국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냉정하게 평가해보자. 그리고 그 최저기준을 설정하자. 일단 그 기준에는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자. 그보다 더 잘하려는 생각은 자신의 성취도를 보고 결정하면 된다. 무턱대고 들이밀게 아니라, 자신이 맛볼수 있는 성과의 크기와 감당해낼 수 있는 노력의 크기를 먼저 저울질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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