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느리게 살고 있는데, 더 게을러지는 오후다. 점심을 먹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 설거지거리를 싱크대에 처박고, 책을 잡았다. 책 속의 문자는 그냥 프린트 되는 활자처럼 내 시야를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고 머리와 가슴에 남는 것이 없다. 안되겠다 싶어 거실로 나와 소파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리모컨 파워를 눌렀다.
‘윙~ 샥샥’
전동 기기가 커다란 무를 순식간에 무채로 만들었다. 와우 혁명이다. 밑반찬을 만들면서 억세게 칼질을 하고 나면 무 하나에 손목이 뻐근하고 욱씬했으니 그 물건이 내게는 혁명으로 보였다. 이쯤 되면 거의 이제 주부 아니겠는가?
‘윙~ 샥샥’
이번에는 슬라이스로 나온다. 오우 죽이는 걸! 넋을 잃고 TV 홈쇼핑 채널에 집중한다. 내 의식 속에 살림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심리가 비쭉거리며 올라온다. 사고 싶다. 살까 말까? 고민이 지속된다. 쇼핑호스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꽂히고 더 싸게 파는 곳은 없는지 나도 모르게 검색을 한다. 언제부턴가 주방기기를 파는 홈쇼핑이 나오면 채널이 고정된다. 스스로 ‘미친 거 아냐?’ 하면서 본능적으로 그 방송에 집중하게 됨은 내가 이미 주부의 반열에 올라왔기 때문인가 싶다. 칼, 그리고 후라이팬 등이 사고 싶어지니 말이다.
사실 홈쇼핑 채널은 아내의 휴식과 함께 하는 최애 채널이다. 그런데 내가 휴식을 핑계로 소파에 몸을 묻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묘한 집중력을 발휘하게 되니 놀라울 따름이다. 때론 가끔 현타가 온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면서 오래된 친구를 만나 멋지게 한 잔하며 수컷의 향기를 품어보기도 하지만 현재의 역할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리고 때론 참 잘 해내니 그 또한 훌륭하다.
어제는 칼질을 하다가 손을 베었다. 처음에 칼이 너무 잘 들어 손을 베나 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칼질을 하면서 칼이 잘 안 들면 손을 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칼갈이에 틈틈이 갈아야 하는데, 이 놈의 게으름은 때를 놓치기 일쑤다. 그래서 손을 베고서야 칼을 갈게 된다. 그렇게 반창고로 왼쪽 집게손가락을 싸고 그 손으로 무심코 누른 리모콘의 압박에 짜증이 한껏 올라올 때, TV에서는 멋지게 잘 드는 다마스커스 칼을 팔고 있다. 기똥찬 타이밍이다.
세면대 하수구가 막혀 다OO에서 이천 원 주고 산 하수구 뚫는 스프링을 넣었다 뺐다 한참 하고서 찝찝한 기구를 씻어 말리면, 어김없이 TV에서는 뚫어 뻥 같은 혁신적인 가루를 판다. 물만 부으면 그냥 쫙 내려간다. 미칠 노릇이다. 그런데 사고 싶어도 용량이 너무 많다. 하수구야 한 번 뚫으면 1년은 그냥 가는데 말이다.
홈쇼핑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하며, 관심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오래된 CD 플레이어에 내가 좋아했던, 015B의 CD를 올리고 ‘新 인류의 사랑’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