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부장님, 이메일 봤는데요. 나는 왜 참조에 넣은 거죠?”
“아 그냥 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네 ~~.”
하루 50여 개의 수신 이메일 중 30개는 제목만 보고 지운편지함으로, 나머지 20개 중 바로 답변 가능한 것은 5통 정도로 빠르게 처리, 그리고 관련이 없는 데도 굳이 보라며 참조해 놓은 메일이 10여 통 나머지 5개의 메일이 그나마 나와 관련이 있고, 조금 심사숙고하면서 답변해야하는 것이었다.
내가 입사해서 약 5년 동안은 이메일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때는 PC통신(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등등)이라는 초창기 통신수단을 통해 기사검색 정도만 할 때였다. 그 시절 홍보부의 홍보맨들은 언론사 마감시간에 앞서 홍보기사를 전달하는 특명이 매일 부과되어 서울시내에서 칼치기 운전은 스킬이요. 과속은 습관이었다. 특히 사진이 포함되는 보도 자료일 땐 언로사별로 모두 한 장식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QS포토 시설이 되어있는 사진관을 단골로 확보하고, 언제나 특급으로 인화를 부탁해야 했다. 오프라인으로 전달해야 하는 모든 일들로 기자들과 직접 대면해야 했고, 그때의 기자들과 유대관계와 안면 인식은 꽤 끈끈했다.
그렇게 구비된 보도 자료를 들고 각각 담당한 언론사를 한 바퀴 돌면 다음에 가는 곳이 지하철에서 판매되는 다음날 조간의 신문가판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사옥 앞에 오후 4시 30분이면 각 사 홍보맨들이 모이고 그들은 모든 신문을 통독하고 회사에 보고 전화를 돌렸다. 90년대 중반에는 휴대전화가 많지 않을 때여서 인근 공중전화는 늘 줄이 길었다. 그래서 막내는 공중전화 줄을 서서 선배를 기다리는 담당일 때가 많았다. 온라인이 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움직이는 삶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동아일보 사옥 앞 가판은 일명 털보라는 분이 운영했는데, 조금 늦을 때는 그 털보형님에게 회사 기사가 난 신문을 미리 빼서 수합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신문을 길바닥에 펴놓고 약 50~100여 명이 단체로 보는 진풍경은 밀레니엄시대가 되면서 점점 사라져 갔다.
인터넷이 생활속에 들어오면서 사무실 업무는 혁명이 일어났다. 언론사를 돌며 보도자료를 전달하지 않아도 되고, 사진을 현상소에서 인화하지 않아도 되었다. 모든 것이 편리하게만 생각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판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어린 홍보맨들에게는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몇 년, 인터넷 시스템의 고효율과 모든 업무에 적용이 쉬워지면서 기사는 인터넷상에 무서운 속도로 파급되었고, 이에 대한 방어홍보는 홍보담당자들에게 스트레스였다. 또한 이메일의 홍수는 기본이고 인터넷을 통한 업무속도는 과거에 비해 엄청난 가속도가 붙어 하루에 처리하는 양 또한 그 만큼 증가했다. 즉 문명의 발전에 따른 그것을 활용하는 인간의 피로도가 증가한 것이다.
그렇게 20년이 지나 전대미문의 코로나 팬데믹이 오면서 이메일과 화상회의, 배달음식, 재택근무 등으로 나에게 이메일은 정말 피할 수 없는 지긋지긋한 문명이 되고 말았다. 매일 50여 개의 이메일을 서둘러 처리해야하는 압박, 행사라도 앞두고 있으면 100개가 훌쩍 넘어갈 때도 있었다. 특히 뭔가 잘못될까봐 염려하는 참조메일을 볼 때면 면피용 공유메일임을 느꼈다. 이메일 하나만으로도 심한 스트레스가 연속될 때도 있었다.
나는 이제 참조의 굴레에서 자유로워 진지 180여 일이 지났다. 매일 이메일 답변과 업무처리를 마치면 거의 오전 일정이 다 지나갔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메일이 기다려지지도 않고 안 봐도 답답하지 않다. 그만큼 이메일을 보며 보낸 시간이 사무실에서 인생을 낭비한 가장 큰 시간처럼 느껴졌다.
지긋지긋한 이메일 참조에서 해방되는 것이 내 삶에 이렇게 큰 자유를 선사할 줄은 몰랐다. 매일 아침 나를 좀비로 만들던 이메일 대신 영혼의 안식과 위안을 주는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과 작은 텀블러에 담긴 커피, 그리고 잘 보이는 활자로 인쇄된 수필집과 산문집은 내 오전 시간의 새로운 루틴이 되면서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나는 벗어났지만 사무실 좀비는 아직도 있겠지.
무엇이 행복인지 느끼기나 하는지. 자신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인식이나 하는지.
바쁜 게 행복이라는 앞서간 이들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