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은 1955년에 탈고한 「헬리콥터」에서 자본주의 문명이 생활의 구속으로부터 개인적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자본주의 문명을 상징하는 “헬리콥터”가 가볍게 이륙하는 것을 보면서, “대지”로 상징되는 물질적 생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사람들이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시인으로서 정신적인 예술에만 전념하려면 먹고살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자본주의 문명이 발달해서 물질적 생활이 향상되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설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볍게 상승하는 것을 보면서 놀랄 수 있지만 또한 놀라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그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해 왔으며, 그것도 간신히 더듬는 목소리로 밖에는 못해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 즉 “주인”(「달나라의 장난」)의 말을 따라야 하는 설움을 당해 온 사람들은 자신이 갇혀 있는 생활의 구속을 상징하는 대지를 가볍게 빠져나가는 헬리콥터를 보고 놀랄 것이지만, 자본주의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면 생활난으로 인한 설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설움이 설움을 먹었던 시절”, 즉 현실 생활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 설움을 감내했던 시절보다도 더 “젊은 것”이 헬리콥터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문명의 “영원한 생리”라고 대단히 긍정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문명이 물질적인 생활난으로부터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도록 해주므로 영원히 새롭고 젊은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 문명이 물질적인 생활난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본주의 문명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헬리콥터가 “1950년 7월”, 즉 한국전쟁 이후에 파괴적인 전쟁무기로 우리나라에 나타났다는 문제점도 함께 지적하기 때문이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자본주의 문명의 우수성을 증명했던 여객용 “제트기”나 화물용 “카고”와 달리 헬리콥터는 사람을 죽이는 전쟁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헬리콥터에게서 “동양의 풍자”를 느낀다고 하면서, 헬리콥터를 “설운 동물(動物)”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전쟁에서 죽음의 도구로 사용되는 과학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힌다. 물질적 생활난을 해결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과학문명이 “좁은 뜰”, “항아리 속”처럼 협소하게 전쟁 무기로 사용되어 슬프게도 인간을 죽이는 살상무기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그에게 헬리콥터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문명은 “자유”인 동시에 “비애”이다. 헬리콥터가 동양의 풍자, 설운 동물, 비애의 상징인 것은 “다시 대지로 내려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전쟁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문명은 물질적 생활난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주면서도 전쟁에서 살상 무기로 사용되어 “비애”를 초래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더 넓은 전망이 필요 없는 “무제한의 시간”을 제시한다. 그리고 “산도 없고 바다도 없는” 현실 생활 세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 가면서 가볍게 날아가는 헬리콥터에게서 “긍지와 선의”를 느낀다. 미래에는 자본주의 문명이 비애가 아니라 자유의 도구로 사용됨으로써 긍지와 선의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가 헬리콥터에게서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을 발견하는 것도 전쟁무기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원래는 생활의 구속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네가 전하는 자유의 마지막 파편에 / 스스로 겸손의 침묵을 지켜가며 울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죽음의 비애를 초래할 수도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폐해를 제대로 인식하면서 아름다운 자유를 겸손하게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생활난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자본주의 문명을 추구하되, 이것이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죽음의 비애를 초래하지 않도록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인간적 비애를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생활의 구속으로부터 개인적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긍정했던 자유주의자이다.
「헬리콥터」(1955)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
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
또한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하여 왔으며
그것도 간신히 더듬는 목소리로밖에는 못해왔기 때문이다
설움이 설움을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젊은 시절보다도 더 젊은 것이
헬리콥터의 영원한 생리(生理)이다
1950년 7월 이후에 헬리콥터는
이 나라의 비좁은 산맥 위에 자태를 보이었고
이것이 처음 탄생한 것은 물론 그 이전이지만
그래도 제트기나 카고보다는 늦게 나왔다
그렇지만 린드버그가 헬리콥터를 타고서
대서양을 횡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동양의 풍자를 그의 기체(機體)안에 느끼고야 만다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그의 설운 모양을
우리는 좁은 뜰 안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항아리 속에서부터라도 내어다볼 수 있고
이러한 우리의 순수한 치정(痴情)을
헬리콥터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을 짐작하기 때문에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動物)이다”
―자유(自由)
―비애(悲哀)
더 넓은 전망이 필요 없는 이 무제한의 시간 위에서
산도 없고 바다도 없고 진흙도 없고 진창도 없고 미련도 없이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 가면서
안개처럼 가벼웁게 날아가는 과감한 너의 의사 속에는
남을 보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보이는
긍지와 선의가 있다
너의 조상들이 우리의 조상과 함께
손을 잡고 초동물(超動物) 세계 속에서 영위하던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을
너는 또한 우리가 발견하고 규정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으며
오늘에 네가 전하는 자유의 마지막 파편에
스스로 겸손의 침묵을 지켜가며 울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