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진 않을 거라고 말씀 드릴 수는 없음을 강조드립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B무비 취향의 사회적 함의를 담고 있는 블랙 코미디이다. 그렇다고 철저히 매니아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객들의 오감을 완전히 만족시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수위가 조금 약하지 않았나 싶었다. 이정현의 유아틱한 연기가 워낙 변수여서 장르적 쾌감과 취향을 마음껏 발산해도 무방했으리라고 보는데. 그럼에도 비순행적 이야기 전개로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취하고 있는 영리한 영화이고, 다소 약한 수위와 아기자기한 구성으로 동화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매력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박찬욱 영화의 양아들이라 불리울 정도로 B스러운 몇몇 장면들과 그의 영화를 오마주한 대사들을 찾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참, 영화 제목도 잘 지은 것 같다.
비순행적 이야기 전개의 효과
-효과적인 장르적 쾌감의 전달.
예를 들어 하나만 설명하자면, (사실 하나밖에 모르겠다.) 우리는 상담사(서영화 역)이 처음 먹은 음식이 복어인 줄은 몰랐다. 이후 이야기가 전개되고 수남이 상담사에게 먹인 음식이 독을 제거하지 않은 복어 요리임을 알았을 때, 우리가 받는 장르적 쾌감은 배가 된다. 수남의 상담이 끝나기 전의 플롯은 순행적이지 않기에, 상담사의 죽음을 갑자기 전개하는 느낌도 들지 않고, 이러한 사건을 예고하는 장치 또한 필요가 없었거나 꼬아놓았기에, 빠르게 훅 치고 들어오는 장면전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로 해석이 되도록 의도하는 플롯 전개.
위에서 언급했듯, 수남이 상담을 받기 전까지의 이야기는 비순행적이고, 상담을 받고 난 후의 이야기는 순행적이다. 상담을 기준으로 극의 끝은 명확하되 처음은 흐리다는 말이다. 영화 속 이러한 구조 자체는 우리네의 답답한 현실을 텍스트화 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그 원리는 어떠할까. 수남의 인생을 들여다보자. 우리가 수남의 인생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였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아도, 안타깝게 영화 내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여공으로 사느냐 / 엘리트로 사느냐>의 문제 만큼 단순하고 피상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즉 원래부터 영화 내에서 수남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될 근본적인 원인은 없었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플롯을 액자형으로 구조화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 속 수남의 처음은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도록 흐려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극의 구조는 우리네의 답답한 현실을 은유하는 영화적 효과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 가령 헬조선에서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에 대해 아무리 자문해보고, 세상에 대한 의심을 품어봤자 명쾌한 해답 없이 답답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그런 현실 있지 않은가. 그런 것들에 관한 영화적 한탄이다.
영화 연기는 캐스팅이 전부다.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캐스팅이 거의 전부가 아닌가 싶어요."- 류승완 감독.
영화 내에서의 배우의 역할은 무궁무진 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배우로 출연한다고 하면, 스토리, 장르, 감독 상관 없이 극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도 하니까. 이런 걸 소위 티켓 파워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요즘 들어서 이 티켓 파워의 영향력이 커진 듯 하다.(나도 순전히 말론 브란도 때문에 '워터 프론트'를 보았고, 로버트 드 니로 때문에 '인턴'을 보았다.) 그러나 배우들의 미숙한 연기로 영화의 흐름을 망쳐버리거나 심하면 작품 자체를 붕괴시켜버리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그만큼 작품성과 흥행성을 떠나서, 영화 자체에 미치는 배우들의 영향력은 다양하고 무궁무진하다.
여기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의 이정현의 연기는 영화의 작품성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주연 여배우 원톱으로서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정현의 연기 연출력부터 자세히 분석하자.
1. 밥을 먹는 장면- 수저를 잡은 손 모양을 자세히 보면 무언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제 처음 스스로 음식을 먹는 다섯 여섯 살 아이들이 수저를 잡는 방법이다.
2.글씨를 쓰는 장면- 글씨의 끝 부분부분 꺾임의 변화를 주었다. 이것 역시 이제 막 글씨를 또박또박 쓰기 시작한 아이들의 글씨체다.
이정현의 연기 곳곳에 묻어있는 이런 유아적인 요소들은 수남이라는 캐릭터에게 소녀성과 순수함을 부여한다. 이로 인해 이 영화가 완전히 블랙 코미디로 순화됐다고 볼 수 있다.
한 명의 배우가 장르 내에서 기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한 연기다.
(이런 연출의도는 영화는 수다다-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편에서 이정현이 직접 밝힌 이야기입니다.)
https://youtu.be/AkKjIOQ_Do8
텍스트와 장면 분석
1. 보청기
수남의 남편은 청각 장애인이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수남 부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살 돈으로 보청기를 샀는데, 이 보청기는 희미하게나마 세상과 소통하려는 의지이자 장치이다. 하지만 그 장치에도 문제가 있었는지 수남의 남편은 그만 일을 하던 중 손가락을 잃게 된다.
2. 공장
무시무시한 굉음으로 가득찬 공간, 수남 부부는 이곳에서 일을 한다. 초록색 바닥에 어두운 음영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출퇴근을 하고 있는 생활의 일부이다. 손가락이 잘리기 전까지, 수남의 남편은 이곳에서 묵묵히 일을 했다. 그는 남들이 버티기 어려워 하는 소음을 깨나 버틸 수는 있다. 귀가 잘 안 들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끔찍한 사고 후의 그 공장은 어떻게 됐을까. 잘 됐을까? 망했을까? 정답은 '그냥 그렇다'이다. 어쩔 수 없지만 당연한 거다. 그의 손가락이 잘려도 공장은 돌아가고, 그의 아내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도 공장은 돌아가기 마련. 어떠한 일이 생겨도 이 공장은, 죽을 때까지 돌아간다. 기계적 공간에 대한 섬뜩한 감정이 든다.
3. 창녀
"창녀랑 산부인과 의사 중, 누가 더 성병에 대해 잘 알까요. 창녀? 산부인과 의사? ...
창녀요. 창녀는 자기 일이니까, 아주 프로페셔널 하다고."
창녀는 자기 일이니까 자기가 알아서 한다. 어느정도로 잘 아냐면, 산부인과 의사보다 성병에 대해 더 잘 알정도다.
수남이도 자기 일이니까 자기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야 할까. 이제 사회에 갓 나온 햇병아리이고, 아직 누구보다 순수하고 여린 소녀인데?(웃음) 물론 예외는 없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라는 창녀의 논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이치이다. 게다가 이 논리는 생존을 위한 수남의 살인- 잔혹 동화의 결말로 귀결되면서,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확고부동한 불변의 진리이기도 하다.
집을 사기 위해,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위해, 살기 위해-수남은 신문 배달, 명함 뿌리기, 아파트 청소, 식당 일 등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고된 일을 한다.
이런 수남의 생존 기술이 영화 후반부에 가면 살인 기술로 활용이 되는데, 이 부분에서 영화는 하층민 여성의 번뜩이는 야생성과 생존본능을 그려낸다. 수남은 자기 일에 프로페셔널했을 뿐이고, 수남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 모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사회의 이치(?)에 맞게 약자들끼리 서로 죽고 죽임을 당하는, 이게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코미디이자, 영화가 시사하는 바이다.
4. 손가락
"저는 맹세코, 제 주머니에 손가락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럴 수 있다. 몰랐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수남의 남편은 손가락을 잃고 말았다. 남편은 수남에게 삐졌다. (이천만 원짜리) 보청기도 박살났다. 남편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끊겨버린 것이다. 수남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청기를 고친다. 남편과 소통하길 원한다. 매일매일 실의에 빠져있는 남편을 위해 수남은 결심한다.
"집을 사야 돼."
남편이 손가락을 잃은 것, 수남이 집을 사기 위해 대출받은 것, 모두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누군가는 손가락을 잃고, 누군가는 식물인간이 되고, 누군가는 죽임을 하고, 누군가는 죽임을 당하고. 그래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다. 그게 지금의 사회이고, 보청기를 고치는 행동 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다.
5. 프레임
수남은 집을 사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 그 중에서도 아파트를 청소하는 일이 있는데, 수남이 아파트에 들어서자 카메라는 수남의 시점에서 파노라마 촬영으로 아파트의 풍경을 담아낸다. 컷을 끊지 않고 계속해서 넓직하게 담아낸다.
이어서 수남은 이렇게 넓은 집이 신기하다는 듯, 두리번 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간다. 집 안에서 집 안으로 더 들어갈 만큼 넓은 집이다.
자, 여기까지의 장면을 이렇게 간단하게 풀어놓고 다음 신을 비교해서 보자.
첫 번째 장면은 수남이 아파트 청소를 하러 들어가는 장면이다. 프레임 전체에서 수남의 모습은 그저 일부분일 뿐이다. 두 번째 장면은 경찰들이 수남의 고시원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누구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숨쉬기도 어려운 프레임이다.
첫 번째 장면 이전에, 카메라는 수남의 시점에서 파노라마 촬영으로 공간을 담아내지만, 두 번째 장면의 카메라는 고정된 상태로 피사체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공간과 인물을 모두 꽉 채워 담아낸다. 물론 고시원이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수남이 청소를 하러 간 아파트의 프레임과, 수남이 살고 있는 고시원의 프레임은 많이 다르다. 이렇게 프레임 내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의 차이와, 공간을 담아내는 방식의 다름은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순하게, 아파트는 넓고 고시원은 좁다.- 즉 "아파트의 주인은 자기 집처럼 여유로운 삶을 살지만, 수남은 고시원이라는 공간처럼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하게 살아간다." 뭐 이런 걸 프레임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6. 분신자살
"분신자살 하셨어요!" 분명 타살인데 분신자살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나라다.
7. 복수는 나의 것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그치?" -<복수는 나의 것 중>
여기서 이정현과 송강호는 같은 맥락을 함께 한다. 과연 죽이는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건? 이런 걸 깊이 생각해 보았다. 슬프게도 이러한 상황이 다소 극단적이진 않아 보인다. 영화 같지도 않다. 나도 언젠간 이해하며, 이해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 같다.
8. 적응
"여기 살기 답답하시겠어요."
"아니요 적응됐어요."
9. 바다
모든 힘겨운 일을 마치고, 수남은 남편과 함께 바다로 간다. 수남씨,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요!
평점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