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듯 친절한 베를린을 추억하며
누구에게나 가장 사랑하는 여행지, 도시가 있을 것이다. 여행 꽤나 했다는 주변인들에게 베를린에 대한 인상을 물으면 극과극이다. 의외로 불호인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는게 현실이다. 지저분한 지하철과 술과 대마에 취한 사람들. 그리고 유색인종에 대해 이유없는 적대감을 드러내는 인종차별주의자들에 대한 기억들 때문에.
런던의 빅벤, 파리의 에펠탑과 같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랜드마크도 없고 (그나마 우뚝 솟아 있는 티비타워가 있지만 랜드마트라 불리기에 미감이 좋지 않다..)
제국과 종교의 영광이 남아있는 로마나, 따뜻한 햇살과가우디의 유산이 있는 바르셀로나와 비교하기도 어렵다. 줄서서 먹고가야할 맛집이 있지도 않고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다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의 삶이 그리운 첫번 째 이유는 무심하지만 언제든 도와줄 자세가 되어있는 개인주의자들이 모인 도시라는 점이다. 서울에서의 삶을 돌이켜 보면 가까운 내 옆 집, 내 사무실 옆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알길이 없었으며 알고 싶지도 않았다. 간혹 출입문에서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경우 뻘쭘하게 고개를 숙이거나 아무런 메세지도 없지만 카톡을 보내는척을 하곤 했다.
지하철에서는 어떤가. 수없이 밀려오는 인파들에게 치이거나 밀려날 때도 사과는 커녕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개인의 탓을 할려는게 아니다. 인구 밀도가 높아 생활 피로도가 높은 한국에서 오히려 사사로운 관심은 사치일 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러 했으므로
그래서 참 낯설었다. 처음보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무해한 친절과 관심. 흔히 스몰 토크라고 하는 일상의 관례들이 번거롭다고 느껴졌고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최소한 하루에 한번씩을 마주치는 내 이웃이며 동네에서 자주 찾은 카페의바리스타와 가벼운 대화를 시작하니, 평범한 일상에서 따스한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날씨며, 일상 얘기를 하면 뭐 어떤가. 내 생활 반경에 속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이야기들은 자칫 쳇바퀴로 치부될 수 있는 반복된 일상의 예기치 못한 즐거움과 변주를 주었다.
이웃 뿐만이 아니다. 대중교통에서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며 양옆에 앉은 낯선 이들에게 가벼운 눈맞춤과 함께 감사를 표시한다거나, 버스 기사님에게 인사를 하는행위, 마트에서 줄을 기다리며 서 있는 앞 뒤 사람들을 보고 적은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 양보한다던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삶에 치이고 정신없이 일과를 보내다보면 이조차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수도 있어서 안한다고 탓하기에는 뭐한 사소한 행동들이다.
이러한 사소한 배려들은 자신의 personal space가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의 것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불필요한 관심이나 평가를 수반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 기꺼이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외에는 완전한 타인으로 내버려 두는 태도.
이외에 내가 베를린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인 예술가들과 개인들이 모인 도시라는 점이다. 예술의 궁극적 존재 이유가 개인성의 표현이라는 점을 미루어 봤을때, 베를린은 자기 표현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여 있다.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사실은 베를린에서도 예외가 아니지만, 예술인을 위한 기본 소득을 보장 하고 다양한 전시, 공연 플랫폼이 보편화 되어 있다는 점도 베를린에 매력적인 아티스트가 모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살던 WG의 하우스 마이스터 Sven과 Sebastian 커플은 본업으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며 동네 커뮤니티 운영을 도맡아 하던 회화 작가였다.
- 커플의 아늑한 거실
체코 출신의 Ferry는 주류 정치를 비판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및 행위 예술가으며, 옆방의 Pier는 홈볼트에서독일문학을 전공하며 주기적인 시낭독회를 여는 시인이자, 필름 사진을 현상하여 생활비를 충당했다. 옆 건물의 paul은 유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편집자였고, 스페인 출신 Anreas는 취미로 밴드를 운영하는 베이시스다. 이렇게 발이 차이는게 아티스트인 베를린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예술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예술가라고 해서 특별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니다.
- 딱맞아 떨어지는 페기구 인터뷰 ㅎㅎ
일상을 공유하는 룸메이트와 이웃들이 아티스트라는 건 꽤나 운이 좋은 일이다. 삶에 대한 가치관과 뿌리가 확실한 이들은 늘 부동산과 주식, 골프와 피부과 시술로 마무리되고는 했던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던 서울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노후를 준비하거나 경제적 안정을 이루는 것 또한 인생에서 꼭 필요한 고민이라는점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나는 먹고살기도 힘든데 사회정의며 예술이 무슨 소용인가 싶은 철저한 물질주의자이다. 그런데 적어도 위에 나열한 키워드가 아니고서라도 내 삶을 가꿔갈 수 있고 오히려 풍부하게 해줄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한 존재와 이유를 알게 되었으며 다양한 삶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래서 베를린이 어떻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베를린은 무심한듯 친절하고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탐구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적합한 도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