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반 동안 쉴새 없이 짐을 싸고 푸는것을 반복하다 보니 여행에 대한 관점이 조금 달라졌다. 이 연재의 첫 꼭지로 쓴 '어떤 이들은 왜 여행을 멈출수 없을까'에도 담겨 있지만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게 저마다 다를거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은 낯선 장소와 언어, 날씨 그리고 사람이 주는 새로운 감각을 체험하고자 기어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자꾸 떠나게 된다. 그렇다면 수 천시간의 여행이 나에게 남긴것은 무엇일까. 내가 여행을 통해 채우고 비운것은 무엇일까.
채움- 여행이라는 환상속, 누군가의 일상
랜드마크 앞에서의 사진을 수집하고 '나 거기 가봤어, 별거 없더라'고 말하는게 여행의 패턴이 되버린거 아닌가 하는 순간이 있었다. 우리가 어떤 곳을 가보고 싶다는 열망은 예고없이 찾아 오기 보다는 대게는 사소하게 스며들었을 확률이 높다. 우연히 돌린 티비 채널에서 소개하는 특정 명소나 지인이 건넨 면세점 전용 현지 과자 일수도 있다. 뭐든 최초로 그 장소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을 테고 그건 분명 타인에 의해 자극이 되었거나 내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욕망의 시초가 그 장소로 이끌었을게다.
특정 여행지를 선택하는데 얼마나 내 자의가 개입되었는지와는 별개로 여행지에서는 분명 내 몸으로 느끼는 나만의 감각과 경험, 그리고 이야기가 있다. 꽤나 많은 데이터가 누적된 후 내가 여행지에서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리츄얼이 있다면 그건 현지인의 삶에 녹아드는 것이다. 이 감각은 도심과 관광지에서 멀어질 선명해지는데, 어느 나라나 도시를 가도 여행객이 많은 곳은 상업화되기가 쉽고 그러면 그 장소는 기존의 로컬들이 아닌나같은 여행객들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우선,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주택가에 숙소를 잡는다. 그리고 아침일찍 혹은 밤 늦게 그 동네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즐겼다. 7시쯤 일어나 동네를 어슬렁 거리며 가벼운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 나라로 치면 기사 식당과 같은 동네 에스프레소 바를 가면 합리적이면서 오랜 단골들로부터 보장된 커미 맛을 느낄 수 있다. 여느 사람들처럼 출근 하기 전 카페에 가서 가볍게 커피챗을 하고 신문을 읽는다던지, 가게 주인과 이런 저런 농담따먹기를 한다. 꽤나 익숙한 이러한 행위들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낀 일상의 감각을 소환하고 낯선 장소가 불러오는 미세한 혼돈감을 중화시킨다.
여행이 주는 큰 행복 중 하나는 돌아올 일상이 있다는 안도감인데, 이 감각을 온전히 통과하고 나서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다. 여독을 풀어내며 지난 시간들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잔상은 에펠타워나 피라미드를 처음 두 눈으로 목도하며 탄성을 터뜨렸던 순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로컬 식당에서 만난 직원의 환대나 동네 공원에서시간의 흐름을 신경쓰지 않고 걸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여행을 하면서 꼭 어디를 가야지, 꼭 어떤 음식은 맛봐야지 하는 to do list를 빼곡히 채우기보다는 그저 그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며 일상과 여행의 경계를 가능한한 흐리도록 만드는게 익숙해졌다.
비움- 물건에 대한 집착
나는 평생을 맥시멀리스트로 살았고,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라고 변명하며 버리지 못하는 지독한 습관이 있었다. 23살 호주로 교환학생을 떠날때도 항공사 직원이 혹시 이민을 가시냐고 물을 정도로 내 몸집 보다 큰 캐리어 두개와 보조가방을 이고지며 기어코 추가 요금을 지불하기도 했다. 그 중 절반은 입지도 않을 옷이였고 절반은 현지에서도 충분히 구입이 가능한 식재료 였다.
이후 짧게, 길게 여행을 반복 하면서 꼭 집에서 챙겨가야하는 게 무엇인지, 현지에서 구매해도 괜찮을 게 무엇인지, 몇 일 정도는 없어도 그만인 건 무엇인지에 대한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메겨진다. 특히 혼자 여행을갈때는 화려하거나 무거운 옷보다는 가볍고 편한 옷으로 가져가고 이동시에 구겨지기 쉬운 소재나 보관이 어려운 옷은 아예 챙겨가지 않는다. 그외 필수적인건 매일 쓰는 기초 화장품들인데 샴푸, 바디워시 등은 현지에서 구매하거나 호텔에 구비된 경우가 많아서 굳이 액체반입룰에 신경을 쓰면서까지 가져가지 않는다.
도시 이동이나 비행기, 기차 등의 시간이 애매할 경우 하루종일 배낭을 메고 다녀야 하는 경우가 있어 짐은어떻게든 최소화 한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 아무리 기대했던 여행지라도 오롯이 집중하기 어려워 내 한계를 가늠하여 중간중간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이처럼 여행지에스며들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를 스펀지처럼 가볍게 만들 필요가 있다.
당분간 장기 여행을 떠날 계획이 없지만, 언제든 짐을 싸서 떠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려고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욕구에 따라 크게 쓰이지도 않을 물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삶이 단정하고 가벼워 졌음을 느낀다. 때로는 여행지에서 사오지 못한 귀여운 마그넷이나 빈티지 티셔츠들이 눈에 아른거리기는 하지만 그럴때마다 여행지에서 남긴 기록과 사진들을 들춰보며 또 다른 방식으로 그 곳에서 느낀 감각들을 불러온다. 여행을 통해 나를 많이 비워냈고, 비워낸 만큼 채웠다. 또 다른 채움을 위해서 비워 내고 또 비워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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