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나로 살아가기
여행을 다녀오면 세상을 보는 스펙트럼이 더 넓어진다고들 하잖아. 정말 그런 건가. 나는 모르겠더라고. 단지 며칠, 몇 개월 동안 여행을 했다고 내 삶이 엄청 달라졌다고 느껴지진 않았어. 인생의 스펙트럼이 넓어졌거나 드라마틱한 성장도 역시 느낄 수 없었지. 대신 따끔거리는 무릎 관절의 통증과 텅 빈 통장만큼 텅 빈 마음을 느낄 수 있었지. 이국적인 환경을 즐기다가 현실로 돌아오니 허무한 거야. 여행을 하면 굉장히 뭔가 성장하고 마음적으로 성숙할 줄 알았는데 돌아오니 모든 게 그대로인 상황을 보니 외국에서 외화 낭비만 하다 온건 아닌가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어. 현실을 벗어나 여행을 한 그 시간은 도피였을까, 행복이었을까, 배움이었을까.
그럴듯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났어. 나는 똑같이 회사를 다니고, 학교를 다니게 되었지. 진급이 코앞에 있으니까 누락되지 않기 위해 일도 열심히 하였어.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회사에서의 좋은 평판을 위해 치열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 묵묵히 걸어가다 보니 제법 안정적이고 편안한 일상이 찾아오더라. 익숙한 일상도 좋지만 점점 도전을 하는데 겁이 생기더라. 내 가능성이 여기까지인지 저기까지인지 확인하고 싶은데 시작도 하기 전부터 덜컥 겁이 생기는 거야. 회사를 10년 정도 다녔으면 후배들을 이끌고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난 여전히 이 길로 가면 맞는지 저 길이 맞는지 헤매고 있다니. 커리어 걱정을 늘 하고 있다니 참담했어. 무엇보다 예전에는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금방 다른 길을 찾으면 되었는데 지금은 편안함을 좀처럼 버릴 수가 없는 거야. 오래 해왔던 일을 잠깐 놓고 다른 업무를 한다는 게 얼마나 두려웠던지.
그때 말도 안 되게 내게 용기를 줬던 경험이 바로 스페인 섬에서의 시간이었어. 수많은 장소를 여행하였지만 란사로테 섬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지. 생각 없이 떠난 여행이었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나를 맞이한 환경이 놀라울 정도로 독특했어. 여행을 떠난다면 주로 아름다운 예술품, 우아한 건축물, 세련된 미술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란사로테에서 고상한 예술작품을 본 기억은 나질 않아. 고상하고 다듬어진 예술품은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었지. 바람, 흙, 물과 같은 그대로의 자연을 말이야. 가만히 생각해 보면 흙, 물, 바람은 어디에도 있어. 우리 집 앞 공원에도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린 보통 꾸미려고 하지. 더 예쁜 공간을 만들려고 흙길에 인조 잔디를 깔거나 짚을 엮어 올려놓지. 보기 좋으라고 일렬로 꽃도 가지런히 심어놓고 말이야. 자꾸만 인간의 손길로 무언가를 만들고 다듬으려 애를 쓰지. 그러니까 원재료는 있지만 원래의 모습은 자꾸만 잊게 돼. 이 장소가 10년 전에는, 20년 전에는, 100년 전에는 어떤 색깔이었는지 감이 오지 않아. 그런데 내가 보고 겪었던 스페인 섬에서의 시간은 당혹스러울 만큼 당당하게 구역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지. 낯설지만 이상하지 않았어. 거칠지만 자꾸만 바라보게 되더라. 어쩌면 한낱 자연환경이지만 분명 난 매료되었고 동경하게 되더라.
나에게 필요한 건 나를 좀 더 드러내고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나는 배우는 걸 좋아해.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좋아해. 창조하는 것을 좋아해.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닐까. 나는 이때의 기억을 더듬어 10년 만에 처음으로 팀을 옮겨 보았어. 타인을 위해서, 누군가의 부탁을 위해 참고 인내하기보단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떠나보기로 용기를 내보았어. 아직 여전히 두렵고 미숙하다는 걸 알아. 하지만 스페인의 한 섬이 그러하듯 당당하게 인정하고 내보여도 전혀 이상하거나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조금은 안심이 되더라.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을 때, 내가 하는 일에 믿음이 흔들릴 때면 온몸으로 솔직히 표현하는 장소로 떠나보길 추천해. 공간을 천천히 바라보며 호흡을 한다면 위안을 얻고, 나에게 좀 더 솔직해지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나 나로 살아가려고 해. 마치 이 섬이 그러하듯, 나도 천천히 나를 드러내고 내 생각에 용기를 가져보려 해.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나로서 살아가도록, 나를 잊지 않도록 생각하고 노력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