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
이 책은 우리가 ‘적자생존’의 개념을 오독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시작한다. 적자는 가장 강한 자가 아니며 적자생존이란 살아남아 생존 가능한 후손을 남길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전략은 ‘친화력’을 통한 자기 가축화였다고 주장하는데, 친화력을 바탕으로 사회라는 협력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지구상의 가장 지배적인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후반부에는 ‘친화력’의 양면성을 언급하며, 내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인간의 배타성으로 인해 현재 인류가 마주한 문제로 논의를 확장하고, 그 해결책으로 접촉과 다정한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여러 가지 실험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해 나가지만 저자 스스로도 대안이 되는 다른 관점이나 상충하는 데이터를 전부 부각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이 논리적으로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에는 친화력 외에도 많은 변수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진화의 결과는 몇 세대 후에나 나타날 것이므로 현세대 인류의 생존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친 ‘친화력’이 미래 세대에서도 계속 선택될 형질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생명체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온 ‘자손을 늘리는 행위’(적자생존)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세대가 등장하여 우리는 유래 없이 낮은 출생률을 목도하고 있다. 친화력이 현 인류를 적자로 만든 형질이라 하더라도 앞으로의 생존에도 유효할 것인지, 개체수를 늘려나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기에 작가가 제안하는 해결책에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다.
다정함을 통해 집단의 벽을 허물어가자는 주장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껴지지만, 혐오가 넘쳐나는 세상에 희망을 걸어보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에는 공감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본성은 추악하다는 회의주의적 태도보다는 인간은 다정하며, 협력을 통해 공생하는 존재이니 노력하자는 이야기가 조금은 허무맹랑해 보일지언정 참 다정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제안이 전쟁을 멈추고, 세상을 바꾸는 구원자는 되지는 못하더라도 내 개인의 삶에는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혐오가 가득한 이 세상의 문제부터 논하기에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때로는 무정하고, 매몰차다.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를 먹어가며 다정하고 친절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함을 느낀다. 다정하기 위해선 상대를 고려해야 하고, 때로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필요하다. 더군다나 다정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방해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어서 모두에게 다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다정함이란 게 꼭 순도 100퍼센트여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분명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가끔 혼을 내거나 화를 내도 나를 다정한 선생님으로 생각할 것이다.(맞겠지...?) 늘 그럴 수는 없더라도 대체로 다정하기 위한 노력으로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일단은 현재의 나에겐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순금만 금은 아니니까... 조금 불순물이 섞여도 그건 금이니까. 다정함도 그렇다고 생각하자. 다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굳이 에너지를 써서 누군가를 위해 다정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정말 다정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