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27. 금요일
'냉장고랑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해' (I need to practice social distancing from the refrigerator)라는 유머를 봤다. 내 말이.
재택근무 2주째, 점점 소화불량이다. 운동을 안 하고 어디 돌아다니는 일도 거의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소화가 안 될 법 한데, 그 상태에서 마트에 가면 자꾸 소고기, 양고기를 산다. 무슨 심리인지, 미국 사람들은 화장실 휴지를 쟁여둔다고 하는데 나는 냉장고에 넣어둘 고기를 사면서 불안감을 해소한다. 차라리 야채와 과일이 냉장고에 없을 때 불안을 느끼면 얼마나 좋을까.
고기를 사와서 시즈닝을 해뒀는데 그게 거의 12인분 이상 쌓인 듯 하다. 상할까봐 매일 한 끼는 고기를 구워먹다가 급기야 점심에는 소고기, 저녁에는 양고기를 구워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냉장실에 남아 있던, 이제 곧 상할 것 같은 갈비용 소고기는 일단 찬물에 담궈서 냉장고에 넣어두면서 '일단 Due를 미뤘다'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찬물로 핏물을 뺀다 해도 며칠 내내 두면 상하니까 오늘은 다시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냉장고 안에 있던 생고기를 꺼냈다. 갈비찜을 만들까 고민하다가, 계속 고기를 반찬으로 먹었는데 갈비찜까지 만들면 속이 버거울 것 같아서 국으로 끓이기로 결정했다. 인스턴트 팟에 핏물이 쏙 빠진 소고기에 무와 통마늘을 넣고 낮은 압력으로 국물요리 모드로 55분을 끓이기 시작했다.
인스턴트팟을 눌러 두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이에나'를 먼저 틀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처음 보기 시작해서 10화까지 단숨에 다 보고 넷플릭스에 11화가 업데이트되기만을 기다려 왔는데, 드디어 금요일이 된 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예능 '나혼자 산다'를 먼저 볼까 하이에나를 먼저 볼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일단 주지훈이 멋있게 나오는 하이에나를 선택했다. 변호사로서 볼 때 무법천지로 행동하는 김혜수의 변호사 역할, 상장되자마자 몇 억 씩 인센티브가 바로 입금되는 장면 등을 보면 헛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다른 드라마와 달리 이 드라마는 법정드라마인데도 묘한 매력이 있다. 이제까지 끝까지 다 본 드라마가 몇 개 안 되는데 하이에나는 끝까지 다 볼 것 같다. 하이에나를 보면서 이걸 다 봐도 나혼산이 남아있다 생각하니 너무 뿌듯했다. 하지만 오전에 있었던 컨퍼런스 콜에 대한 팔로우 업 이메일이 자꾸 와서 중간에 드라마를 멈춰야 했고, 결국 드라마에 집중을 못한 채 11화가 끝나버렸다.
내가 뉴욕 로펌에서 하는 일은 한국 법과 관련된 것들이어서 한국 로펌과 협업을 하며 진행하는 게 대부분이다. 한국에서는 시니어 어소시에이트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왔고 올해 파트너가 되었으니 어느 정도 짬밥이 쌓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뉴욕 로펌에서는 어소시에이트 외국변호사(foreign associate)로 일하고 있고 영어도 유창하지 못한데다 아직 시스템도 파악이 덜 되다보니 일할 때는 정말 1년차 새내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예를 들어, 타임싯을 입력할 때 아직 케이스 오픈이 되지 않은 Prospective 케이스 타임싯을 입력한 후 release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케이스 오픈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결론: 일단 release한다), 케이스가 오픈되면 이걸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 것인지(결론: 비서에게 전환해달라고 이야기한다) 등 모르는 게 아직 많다. 오전에는 뉴욕 사무실 외에 다른 나라에 있는 고객과 컨퍼런스콜이 있었고, 영국 사무실에 있는 변호사로부터 전화도 와서 평소보다는 조금 바빴다. 컨퍼런스콜에 참석한 변호사들 중 나만 어소시에이트였기 때문에, 제일 막내인 내가 컨퍼런스콜 내용을 정리해서 회람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용을 정리해서 회람할까 말까 고민을 했다. '내가 영어를 잘못 들은거면 어떻게 하지' 자신감이 없었지만, 한국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 스스로를 일단 믿고 메모한 걸 바탕으로 이메일로 내용을 영어로 정리했다. 이메일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에 다시 한 번 고민했는데, 컨퍼런스콜을 하면서 내가 영어로 했던 설명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더 여유를 가지고 세련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어 앞에서 작아지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조용히 있는 것보다는 틀려도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걸 더 좋게 보는 것 같다는 로스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결과는 좋았다. 그 이후로 내 이메일을 어떻게 봤을까 수시로 이메일을 확인했다. 안그래도 소화불량인데 더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았다. 한동안 내 정리에 대한 반응이 없어서 그냥 나혼산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로 팔로우업 이메일이 회람되었고 한국 로펌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이제 후련한 마음으로 월요일까지 쉴 수 있다.
이번 주 나혼산은 특히 너무 재미있었다. 남편이 재밌다고 강추한 '이태원 클라스'에 악역으로 나온 배우 안보현이 혼자 사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특히 복싱하는 장면이 너무 웃겨서 뉴욕 집에서 나 혼자 티비를 보고 있는데도 큰 소리로 웃으면서 '진짜 웃겨'라 혼잣말까지 하면서 즐겁게 봤다. 평소같으면 NBC 뉴스를 틀어놓고 음악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쓸텐데, 지금은 안보현 때문에 이태원 클라스를 틀어놨다. 미국에서도 넷플릭스, 아마존, 온디멘드 코리아 등으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쉽게 볼 수 있고 한국 책들도 애플 북스나 리디북스로 편하게 읽을 수 있다니, '라떼는 말이지'라는 말과 함께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한다. 남편이 그렇게 한 번 보라고 할 때에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안 본 드라마인데 지금 이렇게 틀어두다니. 확실히 내 스타일이 아니라 그런지 이 드라마에는 집중이 안 되는데, 보다가 재미를 붙일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새 저녁 8시 33분이 되었다. '오늘은 뭘했지?' 생각해보니 그래도 평소보다는 많은 일을 한 것 같다. 여러 개의 알람을 맞춰두고 하나씩 끄면서도 계속 침대에 누워 있다가 오전 10시쯤 '이제는 진짜 일어나서 컨퍼런스 콜을 준비해야 해'라는 위기감으로 일어났다.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거실을 조금 정리하고 컴퓨터로 로펌 시스템에 원격으로 접속해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컨퍼런스콜 관련 내용을 상의했다. 한국에서 내 친구들과 같이 와인을 마시고 있던 K 언니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서 짧게 안부인사를 전했다. 그 자리에 있던 세 명은 내 얼굴이 너무 부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 중 한 명은 나를 못알아봤다고 했다. 어제 저녁 10시 넘어서 소고기 구워먹고 바로 자서 그래.. 평소에는 이 정도로 붓지는 않아...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영상통화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대충 정리하고 끊었다. 네스프레소 캡슐로 에스프레소 투샷을 내리고, 오트밀크를 빨간 냄비로 데워서 오트밀 라떼를 만들었다. 중간중간 커피를 마시며 스피커 폰으로 오전 11시에 컨퍼런스콜을 하고 내용을 정리해서 회람한 후, 식탁위에서 거의 썩기 직전인 유기농 귤 10알 정도를 레스포삭 작은 가방에 담았다. 홀푸드에서 귤이 4달러도 안 하길래 산건데, 서걱서걱한 게 영 맛이 없어서 그 뒤로 손이 안 가는 상태였다. 이제 점점 오래되서 약간 상할 것 같은 냄새도 나고 귤껍질이 얇고 단단해져서 오늘은 먹든지 버리든지 해치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잔잔한 빨간 꽃무늬로 가득한 레스포삭 가방에 홍삼엑기스를 탄 생수를 담은 물병, 물티슈, 손소독제를 담았다. 5년쯤 전에 타임스퀘어 한복판에 있었던 아메리칸 이글 매장(지금은 5번가 쪽으로 옮겼다)에서 산 PINK라는 브랜드의 검정 레깅스를 입었다. 하도 오래돼서 하얀 색으로 쓰여진 PINK 글자가 쩍쩍 갈라지고 부분 부분 사라지긴 했지만, 평소처럼 그냥 그 레깅스를 입었다. 귀찮아서 양말도 레깅스 위로 올려 신고, 얼마전에 슈프림에서 산 하얀 티셔츠를 입었다. 알렉사에게 오늘 날씨를 물어보니 화씨 60도가 넘는다고 했다. '이 정도면 따뜻한 봄날씨겠는데?' 이제는 화씨로 날씨를 들어도 대충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할 지 감이 온다. 요새 즐겨입는 파타고니아 검정 바람막이를 걸치고 검정색 나이키 러닝화를 신었다. 화창한 봄날씨에 검정색 재킷, 검정색 레깅스가 어울리지 않았지만 요새 내가 그 바람막이를 너무 좋아하는 상태여서 그냥 오늘도 그걸 입기로 했다. 스포티파이로 음악을 틀고, 유펜 서점에서 아이패드를 살 때 공짜로 준 '비츠바이닥터드레'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혹시 통화를 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 애플 이어팟을 가져가고 싶었는데 아직까지도 어디에 뒀는지 기억을 못하고 있다. 검정색 샤넬 선글라스를 끼고 혼자서 센트럴파크까지 걸었다. 세 블럭만 걸으면 센트럴파크가 나오는 좋은 곳에 살고 있다.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이 상황이 힘들지만, 매 월내는 값비싼 렌트를 제일 제대로 활용하고 이곳을 떠나는 셈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뉴욕에서 6피트의 거리만 유지하면 공원에 가서 간단한 운동을 하는 것은 허용되는 상황이라서, 센트럴파크는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뉴욕의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다.
66번가 쯤에 있는 센트럴파크 서쪽 입구에서 센트럴파크 안으로 들어갔다. 새 소리가 가득하고, 저 앞에 보이는 빌딩숲을 배경으로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고, 녹색의 나무들과 잔디, 핑크빛 벚꽃이 공원을 채우고 있었다. 큰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들, 나무 기둥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캐치볼을 하는 사람들 등을 보니 소화불량 상황에서도 내 몸 안 속으로 상쾌한 공기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쉽메도우 (Sheep Meadow) 안쪽으로 들어가서 한참을 걷다가 빌딩숲을 바라보는 벤치에 앉았다. 가방에서 손소독제를 꺼내서 손을 비비고, 귤을 하나씩 까서 먹기 시작했다. 음악을 들으며 선글라스를 낀 채로 인스타그램도 하고 한국 신문기사들도 읽었다. 결국 가져온 귤을 다 먹었고 센트럴파크를 나섰다. 집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쥬빌리 마켓에 가서 장미꽃과 안개꽃, 노란 국화와 초록색 잎 가지들이 묶여 있는 꽃 한 다발을 집었다. 계산할 때보니 24달러가 넘어서 조금 놀랐지만 (보통은 10불 전후의 꽃다발을 샀다), 식탁에 두니 너무 예쁘다. 오늘따라 슈퍼에 화장실휴지도 가득 있고 (단, 한 명이 두 개만 살 수 있다) 내가 찾던 오쿠라와 냉동만두도 있었다. 난 이제 곧 이사를 갈 거기 때문에 휴지는 사지 않았지만, 손 씻는 물비누, 식탁을 닦을 유리세정티슈를 샀고 오쿠라와 냉동만두, 그리고 파이렉스의 식빵굽는 틀도 샀다. 이사를 앞두고 심지어 식빵 구울 재료도 없으면서 그 틀을 사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요새 요리를 하면서 유리용기가 너무 좋아서 모든 반찬통과 요리 도구들(계량컵 등)을 유리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터라 충동구매하듯이 식빵굽는 틀을 샀다. 아마 계속 뉴욕의 모든 상점과 레스토랑이 문을 닫으면, 슈퍼에서 파이렉스를 하나 하나 사서 모을 것 같다.
집에 와서 슈퍼에서 산 것들을 정리하고, 소화가 안 되는 와중에 이미 유통기한이 살짝 지난 식빵 3쪽을 오늘은 먹어 치워야겠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커다란 테팔 후라이팬에 식빵을 올리고 계란을 하나 깨서 구웠다. 식빵 한 쪽에 딸기쨈을 바르고 치즈를 한 장 얹었다. 다른 식빵 한 쪽에는 이탈리안 수퍼마켓인 Di Bruno's에서 산 피스타치오 스프레드를 발랐다. 다 구워진 계란을 사이에 넣고 종이로 만들어진 'If You Care' 샌드위치 백에 내가 만든 토스트를 담았다. 올가닉 벨리(Organic Valley)의 우유를 한 컵 담아서 같이 먹으니 달콤한 샌드위치와 시원한 우유가 잘 어우러져서 맛있었지만 점점 더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 들었다. 코로나에 걸리면 맛을 볼 수가 없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는데, 음식이 맛있게 느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 후 갈비탕을 끓이며 티비를 보기 시작했고, 다 끓여진 갈비탕을 냉장고에 넣어둔 후 지금 이렇게 이태원 클라스를 보며 글을 쓰고 있다.
이제 저녁 9시 16분이 되었다. 아직도 여전히 소화불량인데, 뭔가를 또 먹고 싶다. 오쿠라를 가득 넣은 냉소바를 먹고 싶기도 하고, 고기를 구워서 김치찌개와 같이 먹고 싶기도 하다. 그냥 아이스크림만 먹을까? 이렇게 오늘도 냉장고와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실패로 끝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