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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y JP Oct 13. 2020

저녁 대신 와인

2020. 10. 12.

오늘은 하루종일 외부 회의가 있었다. 종로와 강남을 돌고 돌아, 다시 사무실. 회의 때문에 오랜만에 강남역까지 나갔다. 사실 회의장소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냥 다음 일정으로 향한건데, 대리님이 내려준 곳이 강남역 근처 어느 빌딩이었다. 미팅은 2시, 도착한 시간은 1시. 점심을 먹기에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 만원 남짓 주고 맛있는 피자를 먹었다. 다 먹기는 힘들어서 1/3정도 남기고, 폴 바셋에서 따뜻한 라떼도 마셨다. 대학생 때 자주 가던 강남역에 근 10년만에 간 것 같다. 어렴풋이 옛날 생각이 났다.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회사로 돌아와서 저녁을 거르고 계속 일을 했다. 저녁을 먹으면 퇴근시간이 더 늦어지니까. 저녁을 안 먹으면 그래도 9시쯤에는 집에 갈 수 있는데, 저녁을 먹으면 10시는 무조건 넘게 되는 정도의 workload. 


떠밀리듯 마지막 이메일을 싱가폴로 보내고 마스크를 끼고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기특한 H1은 벌써 오늘의 reading diary를 해놨다. 물론 character와 drawing은 무성의하게도 며칠째 happy face 하나로 끝이다. 그래도 혼자서 영어 책을 마음대로 읽고, title과 author's name을 찾아서 쓰고, 맘에 드는 문장을 하나 찾아서 써둔다는 게 대견하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몇 주 밀린 숙제를 조금 더 봐주었다. 모든 instruction을 영어로 읽어주는데도 알아듣고 하는 걸 보면 신기하다. 나도 law school을 다닐 게 아니라 preschool을 다녔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끔은 진지하게 든다.


뉴욕바 선서를 하려면 서류를 준비해서 내야한다. MPRE, NYLE, UBE는 모두 합격했으니, 서류만 준비하면 되는데 나는 온라인으로 선서하는 게 싫어서 마냥 미루고 있다. 올해 말이나 내년에라도 뉴욕에 가서 선서할 수 있을까. 이걸로 뉴욕에 한 번 더 다녀올 수 있다면, 그래도 preschool보다는 law school 졸업이 나은 것 같기도... 사실 뉴욕주 변호사시험에 합격했고, 심지어 아이비리그의 law school까지 졸업했지만 내 영어실력은 여전히 별로다. 어찌저찌 영어로 업무 이메일은 보낼 수 있지만, 말을 하려면 영 촌스럽다. 촌스럽게 말하는 내가 싫어서 미국에 가서 더 말을 안하고 피했던 것 같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그럴 것 같아서 후회가 되지는 않는다. 후회가 된다면, 대학생 때 영어 공부를 더 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 때도 난 이미 늦었다는 생각을 했었지...


이번 추석에 강원도 고성으로 여행을 갔는데, 호텔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있으면 계속 미국 뉴스를 틀어놨다. 그러면 완전히 일상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어서 만족감이 컸다. 와중에 트럼프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뉴스를 서핑 후에 봤을 때는, '지금 내 독해에 문제가 생긴건가' 하면서 네이버로 뉴스를 찾아봤었다.


어떤 면에서 보람있는 시간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별로인 추석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제 한글날 연휴도 지나갔고, 영락없는 rare 월요일, 10월이네.


H1, H2가 남편이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잠들고, 나는 오늘 intensive했던 하루를 어떻게 마무리할까 고민하다가, 인도네시아어로 하는 인스타그램에 throw back 사진들을 몇 개 올렸다. 뉴욕에서 일하던 때 J 언니와 함께 회사 세미나에 참석한 후에 브라이언트 파크 근처의 바에 갔던 날, J 언니와 함께 점심시간에 뉴욕 스시집에 갔던 날, 빠리에서 보낸 Spring Break. 아, 아마존에서 9월말에 주문한 인도네시아어 책들 4권이 오늘 집에 배송되었다. 미국에서 주문한 인도네시아 책이 한국까지 배송되다니, 참 좋은 세상이야. 교보문고에 책 구매 가부를 물어봤지만 어렵다는 대답이 왔었는데.. 지금은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 영문본을 사고 싶어서 아마존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는데, 배송료가 책값보다 비싸서 다른 책들이 어느 정도 모이면 order버튼을 누를 예정이다.


그렇게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다가, 와인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요새 일주일에 합쳐서 한 병 정도 와인을 마신다. 내일은 당장 급한 일이 없으니 부담이 적었다. 그렇게 현대백화점 신촌점에서 산 half bottle 와인을 한 병 열었다. 거대하고 무거워서 무식하게 보이는 르쿠르제 와인오프너로. 저 half bottle 와인은 온전히 내가 내맘대로 산 와인이니, 내맘대로 열어도 마음이 편하고, 다 먹지 못해도 아깝지가 않다. 이렇게 2시간 넘게 혼자서 거실에 앉아있다. 내 지겨운 Spotify playlist의 노래는 지나고 지나서 이제 Bruno Major 노래도 막바지다. 조성진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 1번을 어제부터 100번 넘게 반복해서 듣다가, 팝송으로 넘어왔다. 우울한 기분이 추석 끝날 무렵 시작되어, 잠깐 사그러들었다가 주말에 계속 시작되었다. 나는 참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이루었는데, 왜 이렇게 청승을 떨고 있나.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다. 작년 크리스마스즈음, 뉴욕에 있는 집에서 '저스트 키즈'라는 책을 읽었었다. 그 저자의 인생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 생각을 들은 내 가장 친한 친구는, '철없는 강남 아줌마 같다'고 이야기했다. 하하... 남편도 6월쯤이었을까, 나에게 '이제 땅에 발을 붙일 때'라고 했다. 동생은 '형부같은 남편은 한국에 없을거야'라고 이야기했다. 나도 공감한다. 서울에 모든 것이 있다. 내 가족, 내 일과 커리어, 자산과 발전가능성.


그런데도 나는, 빈털털이가 되어도 좋으니 다시 미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슈퍼에서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사서 끼니를 떼우고, 남는 시간은 공원을 거닐 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처럼 이니셜을 흘려버리는 게 아까워서 근처에서 쓸데없는 먹을거리를 사고, 먹고, 다이어트를 생각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운동을 안 한다고 스트레스 받고,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다가도,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끊임없이 반문하고, 피로사회 안의 우울사회를 읽으면서 위안을 얻는 바보같은 일은 그만두게 되지 않을까.


아닌가. 빈털털이로 미국에 가게 되면, 벌레가 나오는 집에서 살고 공연도 맘편히 보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나 스키도 못하게 되니 별로일까. 몇 년만이라도 살다오면 좋을까. 그냥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고 감사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하지, 생각해도 묘책은 없다. 어차피 코로나로 모든 것이 lock down이니까. 다행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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