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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가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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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x NULL Aug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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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가기

2019년 7월 26일 17시 모분

아침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오후 3시면 퇴근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마지막이란 으레 그런 것.


저녁식사 시간, 서너 명의 동료들이 식당으로 내려간 사이 한 손엔 에코백 두 개, 다른 한 손엔 H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복도를 돌아 나섰다.

가는 길가에 자리한 다른 동료와 후배들에게는 내일 다시 볼 것처럼 손을 흔들며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간단히 나눈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분명 몇몇은 여러 생각을 하는 듯했고 몇몇은 정말 남의 일처럼 여겼을 거다. 짧은 찰나의 순간, 그런 눈빛들이 읽혔다.

급한 듯 사라졌지만 복도 모서리 끝에 있는 문서세단기 앞에 멈춰 서서 쇼핑백에 담겨있던 A4용지들을 갈아 넣으며, ―세절기는 몇 번이고 삐빅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서들을 뱉어내었고 종이와 씨름이라도 하듯 역행 버튼, 시작 버튼을 거듭 반복한 끝에― 종이가방을 모두 비웠다. 기역자로 꺾인 복도를 마저 지나 엘리베이터 홀에 다다라서야 생각난, 저쪽 반대편에 있을 다른 팀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서 인사를 했다.

지금 식당에 와있다며 시끄러운 배경 소리와 함께 어영부영 인사를 마치고 나도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에 도착했다.

에코백 두 개는 X레이로 들여다보는 보안검색대에 넣고 게이트에 카드를 찍고, 정확히 말하자면 모바일 사원증이 담긴 스마트폰 뒷면을 태깅하고 나와서 폰카메라와 USIM 슬롯의 봉인을 한 번 더 확인시켜 보이며 마지막 근무시간을 마감했다.

하나의 게이트를 더 통과해 주차장에 도착하니 정말 애매한 시각이었고 글을 적는 지금 다시 당시 시간을 역산해보니 6시가 채 안 된 시각이었나보다.

서초구에 위치한 R&D센터로 내비게이션을 맞추니 예상 소요시간은 1시간 2분에서 10분 혹은 17분 자꾸 늘어나는 것 같다. 도착 예상시간은 7시 2분? 5분? 이러다 보면 아마도 7시는 무조건 넘은 시각일 테다. 금요일 퇴근시간이지만 조금만 덜 막힌다면 7시 전에 도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주차타워를 빠져나가는데, 아니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길이 막히기 시작한다.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가 아예 그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시간은 한 시간이 족히 넘어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서초구 ㅇㅇ동에 들어섰을 무렵 내비게이션에서 시보가 울렸다.

"저녁 일곱 시입니다."

배가 고픈데, 식당 저녁 운영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몇 분이 더 흘러 목적지에 도착. 해가 지기 전 하늘이 밝을 때 출발해서 '팬톤 올해의 컬러 2016' 그러니까 팬톤이 선정한 2016년의 컬러와 같은 하늘색일 때 도착했다.


무엇인가의 끝맺음을 짓는 일, 그중에서도 아주 큰 일들은 여름에 자주 일어났다.
졸업은 항상 2월에 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우연히도 그렇게 됐다.


2019년은 장마의 시작이 언제였는지 모를 마른장마가 이어졌고 오늘이 마지막 장마라고 했던가 이번 주말이라고 했던가 싶은 그런 날이었다. 온종일 비가 오락가락했고, 장마라기보다는 스콜처럼 수시로 쏟아붓는 비가 계속된 하루였다.


서울에 도착하니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고, 한참 전부터 배가 고파 지근거리의 식당에서 회사가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저녁을 먹었다.

맛은 그저 그랬다. 재작년 여기로 출근하던 무렵엔 없던 식당이다.

창밖은 이미 밤이 돼 있었다. 아직 야경 사진을 찍기에는 적당한, 매직아워를 막 넘어가고 있던 시각쯤이었던 것 같다. 감상에 젖어 사진을 한 장 남길 법도 했지만 굳이 폰카메라에 붙어있는 봉인스티커를 뜯고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다시 주차장에 가서 차를 몰고 진짜로 퇴근했다. 혹시 그사이에 메일 회신이 오진 않았을까, 공용 PC에서 인트라넷에 로그인해볼까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하지 않았다. 그만두는 것도 아닌데 뭐.

내년 이맘때 다시 돌아갈 것이고 다시 인사할 것이고 그럴 것이다.





2019년 7월 30일 화요일

여느 주말처럼 주말이 지나갔다. 월요일이 되었고 여느 휴가와 같이 푹 쉬었고 별 일은 없었다. 화요일이 와도 늦잠을 연이어 잤고, 또 별생각 없이 오후가 됐다. 공식적으로도 엄연히 연차였으니 마지막 휴가를 여유롭게 보냈다.

업무용 메신저로 팀원이자 그룹원이고 파트원이며 셀원인 사람들 몇몇과 연락하며 약속 시간을 잡고 간간이 이어지는 업무이야기를 관조했다.

퇴근시간에 맞춰 약속시간을 정했더니 이내 출출해졌고 아내가 끓인 라면을 한 젓가락 먹고선 시간 맞춰 집을 나섰다. 딱 동네 마실 나가는 차림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약속 장소 그러니까 회사 퇴근버스가 내려주는 곳에 도착하니 마침 저만치서 신호를 받고 좌회전하는 셔틀버스가 보였다. 그 버스에서 내린 세 명의 동료를 만나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가려고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둔 식당에 도착했는데, 내부공사 중이라는 커다란 현수막과 함께 식당이 문을 닫았다.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플랜 B로 점찍어둔 옆 식당으로 갔더니 자리가 만석이었고, 컨틴전시 플랜까지 가동하여 몇 걸음 떨어진 근처 식당을 찾았더니 하계휴가로 휴무. 자가용으로 이동한 세 명이 더 합류하여 총 일곱 명이서 식당가 복도에서 서성이다가 바로 앞에 보이는 그냥 식당으로 향했다. 걸어서 5분 거리 그리고 15분 남짓한 거리의 대안도 찾아놨었지만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번거로우니까.

이곳 특성상 대부분 가족 손님들이고 소규모다. 식당 한복판에 자리 잡고 맥주 한잔씩 하면서 꽤나 떠들었다. 주변 다른 손님들에게는 죄송했다. 근무일수로는 단 이틀 지났을 뿐인데 까맣게 지워버린 '이슈'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됐지만 동료들에게는 현재인 이야기들.

그러던 와중에 문득문득 이 사람들이 참 고마웠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5년 전의 인연으로 마지막에 함께 일한 '회사사람들'인데, 송별회까지는 아니었지만 여하튼 못내 아쉽다며 저녁시간을 내어준 사람들이다.

아주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바로 옆 아까 자리를 못 잡았던 플랜 B로 자리를 옮겼다. 한 잔만 더 하자며 간 건데 종업원은 마감시간이 1시간 남았다며 괜찮냐고 물었고,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얼마 안 돼 라스트 오더라고 더 주문할 것이 없냐고 물어왔다. 퍼스트 오더도 아직 안 나왔는데 어떻게 라스트 오더를 하냐며,―물론 무언가를 더 먹을 생각도 없었지만­―­우리끼리는 서로 웃자고 하는 그런 말들을 나눴다.

한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중간중간 시계를 확인했는데 정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다들 내일 출근이 있으니, 그리고 갈 길들이 멀어서 3차를 갈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그런 회사 얘기, 매일같이 메신저로, 면대면으로 하던 이야기들을 한참 동안 풀어냈다. 지난 나의 과거를 회고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으니 잘됐다. 지난주 회식 때 그런 자리가 있을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는데 그때도 다행히 별일 없었다.


이런 거 석 잔은 마실 수 있다며 호기롭게 얘기했던 시작과 달리 반주로 한 잔, 그리고 한 잔을 더 마셨을 뿐인데 일어서려니 취기가 올라왔다. 결국 종업원들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업 종료시각이 돼서야 자리를 파했다.

삼삼오오 화장실을 잠시 다녀오는 사이 건물 셔터가 내려가고 비상구 통로만 남았다. 그 와중에 이 부서에서 일한 지 1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단체 셀카를 리모트 펜으로 몇 장 남기고는 비상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건물 밖으로 나와 다 같이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는 길, 단체 톡방을 만들었다. 이 역시 1년 6개월 만이다.

그 전에는 회사 메신저에서 충분히 얘기할 수 있기도 했고 굳이 회사에서의 관계를 퇴근 후까지, 휴일까지 이어가지 않으려는 나와 각자의 노력과 생각들 덕분이었을 게다. 어쨌든 나는 더 이상 메신저를 이용하지 못할 테니 외부 메신저의 단체 대화방이 필요했던 건데, 이것도 참 고마웠다. 내 성격상 용건이 있는 연락 외에 개개인에게 시시콜콜 안부를 묻는다거나 인사를 전하진 않을 텐데 드문드문 연락하더라도 설사 아예 연락이 없을지라도 창구가 열려있는 건 아닌 것과는 다르니까.


지하철역 0번 출구 앞, J님이 선물이라며 자두를 건넸다. 퇴근길에 자두를 먹는다길래 농담 삼아 남는 자두 있으면 달라고 채팅창에 남긴 몇 글자에 자두 네댓 알이 담긴 통을 챙겨 와 내민 것이다. 참으로 고마웠다. 그 마음 씀씀이에. 깊게 알면 모든 사람이 그렇긴 하지만 유난히, 다들 개성이 다르고 비단 회사에서의 커리어뿐만 아니라 살아온 배경이 매우 다른 사람들인데, 하나같이 좋은 사람들이다.

몇 명은 지하철로 향하고 몇 명은 택시를 타면서 헤어졌다. 나는 홀로 수백 미터쯤을 더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 습기가 찬 자두 사진을 한 장 찍어 단체방에 올리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오늘 갑자기 잡은 약속은 아니고 몇 주 전부터 시간을 맞췄지만 공교롭게도 약속을 정했던 그 날에 잡힌 회식 때문에 한 주 미뤘던 약속이었다. 그 약속까지 끝났으니 회사사람들과의 일은 이제 정말 쉼표를 찍었다.






그 다음날

밤을 지나 새벽으로 향해갈 무렵 한 번 더 쉼표가 날아들었다.




2013년 6월 26일

2011년 8월 27일

2007년 8월 3일

여름의 이야기를 더 적어볼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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