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가장 작은 한입으로부터

우리의 첫 맘마

by 라민 육아 일 기

*음식을 주제로 한 모 기업의 에세이 공모전에 출품했다가 탈락한 기념(?)으로 공유합니다.


학생 시절에도 경험해 보지 않은 공모전에 처음 도전했습니다.

초보 엄마 티 팍팍 내며 아이의 첫 맘마를 만들었던 기억을 더듬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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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작은 한입으로부터


서른 살, 엄마가 되었다. 스무 시간이 넘는 진통 끝에 얻은 금쪽같은 아이를 건강하게 키워내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신생아의 울음은 배고픔과 직결된다. 온몸으로 용써가며 울더라도 젖병만 물리면 세상이 평화로워진다. 배불리 먹어야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잠이 솔솔 올 것이니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과는 먹는 것.


'잘 먹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분유 하나, 물 한 병도 허투루 고르지 않았다. 먹성이 좋은 아이여서 수유 양이 또래보다 많았고 만 5개월 무렵 이유식을 시작했다. 이유식 준비물은 제2의 혼수라고 했던가. 소꿉놀이 같은 조리도구와 숟가락, 턱받이와 그릇까지 준비했다. 첫 아이의 첫 무언가를 고르는 일은 정성스러움과 유난스러움 사이를 오가는 일이었다.


아이의 난생 첫 번째 식사 메뉴는 ‘쌀미음’

재료는 불린 쌀 또는 쌀가루 15그램, 10배의 물.

- 봄눈처럼 고운 유기농 쌀가루를 찬물에 갠다.

- 어른의 음식이 묻은 적 없는 새 냄비에 새 주걱으로 저어 폴폴 끓인다.

- 농도가 맞으면 불을 끄고 그릇에 옮겨 식힌다.

- 바로 먹일 양은 덜어 두고 나머지는 소분 후 밀폐해서 냉장보관을 한다.


신혼생활을 하면서 집밥도 척척 해 먹고 꽤나 주부 내공이 쌓였으니 '미음쯤이야. 식은 죽 끓이기지!' 하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책에서 알려주는 대로 만드는데 왜 마음처럼 잘 안 되었을까.

한참 젓다가 잠시 한눈팔면 끓어 넘치거나 눌어붙고야 마는 쌀가루 죽과의 고독한 힘겨루기가 끝나야 어른의 한입 만치도 안 되는 양이 만들어졌다. 무색무취의 끈적하고 밍밍한 이 것이 난생처음 맛보는 우리 아기 식사라니.


통통한 두 볼 사이에 작은 숟가락을 들이밀자 아이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에 묻혀줬더니 혀로 몇 번 굴려보고 꿀떡꿀떡 받아먹는 모습에 초보 엄마, 아빠는 박수가 절로 나왔다. 다음 차례를 식히는 동안 더 달라고 손바닥으로 밥상을 내려치는 모습은 기특하기까지 했다.


아기 참새는 세상 처음 느껴보는 음식의 맛과 질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잘 받아먹었고 단계를 거듭할수록 미음은 죽으로 된죽은 밥으로 성장했다. 과일즙, 찐 고구마와 감자, 잡곡, 구운 채소까지 쌀알 같은 이가 하나씩 날 때면 먹일 수 있는 재료의 가짓수도 늘었다. 품에 안고 먹이던 수유와 다르게 한입 두입 떠먹이는 즐거움은 정말이지 컸다. 나의 산후우울증 극복법은 이유식 만들기와 먹이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어느덧 만 세 살이 되어 식탁 한 편을 차지하고 서툰 젓가락질을 하며 식사를 즐긴다. 어른의 음식에 호기심을 보이고 가끔은 반찬 투정을 한다. "엄마, 맛있어요. 더 주세요!" 어깨가 으쓱해지는 말을 들려준다.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 집밥을 먹고 자란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먹은 엄마 밥상의 시초는 쌀미음이었구나. 직장인이 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먹는다기보다 한 끼 때우는 것에 가까웠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나를 가꾸는 시간에 비해 먹는 중요함은 잊고 살았다. 이유식 만들기를 시작하면서 당연한 줄 알았던 엄마 밥상이 새삼 귀하게 느껴졌다. 한술 더 뜨라고 할 때 말 들을걸.


발품을 들여 제철 식재료를 구하고 그날의 작물과 고기는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원산지와 생육 과정을 따져보고 가족이 먹을 밥상 위에 내놓기까지의 과정이 수고스럽고 신중했을 거다. 정성 어린 과정에 비해 먹는 시간은 잠깐인데도 비워진 그릇을 보면 한참을 기뻤을 것이다. 내가 맡아보니 알 것 같다.


눈과 입이 즐거운 고급 밥상도 순식간에 완성되는 흔한 간편식도, 우리 입에 들어가는 모든 먹거리의 처음에는 누군가를 ‘잘 먹이기 위한’ 느린 연구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럼 내 앞에 주어질 모든 날 모든 끼니가 다 고귀하고 나를 살리는 것이 된다.


나는 오늘도 도마 위에 사랑을 다지고 불 앞에서 가족의 건강 한 소끔을 끓여 오목한 사랑을 담는다. 세상 가장 느린 음식, 세상 가장 작은 한입으로부터 배운 진심을 담뿍 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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