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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 베유 Oct 02. 2023

이해받지 못하는 감수성을 가진 모든 이방인들에게

- 카뮈, 이방인 서평 - 

 이해받지 못하는 감수성을 가진 모든 이방인들에게


1


문학은 절망을 이겨내게 하는 힘을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문학의 힘을 알게 해 준 책은 이방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당시, 정말 한 장 한 장 넘어가면서 어떤 문장이 있을까 마음을 숨겨가며 넘겼을 적이 10여 년 전인데 아직도 그 감정이 생생한 걸 보면 참으로 나에게 카뮈라는 사람은, 이방인이라는 작품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절망을 이겨낸다는 감히 스케일이 큰 표현까진 쓸 수는 없었으나 마음에 해방감과 상큼함을 주는 작품이면서도, 세계를 어느 정도는 뒤집어놓는 작품이라고는 생각했었다. “어느 날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라는 첫 문장은’ 엄마가 죽었을 때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엄마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라는 이해를 터뜨렸다. 그 이해는 어린 날의(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나의 감정의 어떤 도화선을 자극한 것만 같았는데, 카뮈의 작품을 한 장 한 장 넘겨갈 때마다 ‘엄마가 죽었을 때 내가 진심으로 슬퍼할까?’라는 질문은 더 커져가고 있었다.


마침내 내가 가진 결론은 그렇게 슬퍼하진 않을 것 같았다-라는 결론이었다. 물론 이방인을 읽고 난 뒤 소감은 그렇게 짤막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내 언어, 내 표현이 무엇인지 짤막하게 경험을 한 나는 결정적으로 내 진로를 철학과로 결정해 버리는데, 내 안의 질문을 키워내 앞으로 향후 방향성을 결정하게 끔 만들었단 점에서 감히 영향이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에도 과목을 정할 때도, 책모임을 결정할 때도 심심치 않게 이방인은 영향을 끼쳤다. 이방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왜 하필 이방인이었나-를 생각해 보면, ‘나는 느끼지 않은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사회’라는 주제가 좀처럼 떠오른다. 당시 내가 이방인이라는 책에 응감 했던 흐름은 이렇다. 마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인천 지역은 투박하기로 유명한데, 적어도 내 학급 내에선 인문학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또한 스펙터클한 가정사를 겪다 보니 더 감수성은 세밀해졌을 터, 남들이 느끼고 보는 감정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느꼈는데 그게 나 스스로에겐 화두였나 보다. 무리는 언제나 같은 감수성을 공유해야만 뭉친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리에서 소외되면 본래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남들보다 좀 더 많이 느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방인이라는 책은 나의 심장에 파고들어 마음의 혈류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여린 감수성을 가진 고3 친구에게 ‘남들이 뭐라 그래도 네가 느낀 감정은 그저 감정이야.’라는 까뮈의 말은 가히 ‘절망을 이겨내게 해 줄 힘’에 가까웠다. 그 소외감에 나름대로 자퇴를 고민하기도 하고, 학업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할 때였건만 어찌어찌 끝까지 해내간 건 확실히 까뮈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2


이방인이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물론 지금 보아도 쉬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생각이 깨진 건 독립서점들을 들어갈 때마다 이방인이라는 책이 심심치 않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나로서 낯선 일이었다. 대학교 1학년에 들어오자마자 추천하고 다녔던 이방인이라는 책이, 다들 어렵다고 거부했던 그 책이 큐레이션까지 된 채로 독립서점의 볕 드는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기도, 반갑기도 하였다.


의문이 풀린 건 독서모임을 진행하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매 번 모임을 진행할 때마다 유달리 공무원, 특히 직업을 선생님으로 두고 있는 분들이 이해도, 공감도 빨랐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평소 고민하고 있었는데 불이 붙었다고 해야 할까. 마치 감정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나에게 이방인이라는 불이 떨어지듯, 그들에게도 마르크스의 불이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추측건대, 이방인이라는 작품은 머리로 추천되었다기보단 마음과 몸의 정직한 반응으로 추천된 것 같다. 고3 시절 철학에 대한 이해 없이 이방인을 독파했을 때, 이를 충분히 소화는 못했지만(물론 지금도 완전히 이해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몸 자체가 받아들여 미래를 바꾸는 선택까지 이어진 것처럼 이제 이 이방인을 마음과 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각자 감수성이 달라지고, 느끼는 바가 많아지면서도 세심해지는데 다른 사람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않고,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채널은 점점 늘어나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잠깐 체류하거나, 이방인 연인을 사귀어 사고방식이 달라져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느끼거나 한다면 이방인은 강렬한 의미로 다가오리라고 예상한다. 그렇다면 이방인은 마치 공직의 답답함을 가지고 있다가 마르크스라는 언어를 만나 피어오르던 열정처럼, 소외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언어가 되어주지 않을까.


3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방인을 6독쯤 한 것 같다. 가장 처음에 읽었던 감정과 이방인 발제를 했다가 교수님께 욕을 먹었을 때 들었던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독립서점의 가장 볕 드는 곳에서 만났던 반가움, 포켓판의 번역을 보며 “이게 뭐야…” 하고 실망하면서도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적용하고 싶었던 부분은 (동어 반복일 수 있지만) ‘억지 감정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스스로에게 ‘사회생활’이라는 단어로 그리고 ‘타인에 대한 환대’라는 단어로 억지로 느끼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좀 더 경청하려고 억지스럽게 귀를 기울였고, 의자를 당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럴 수가. 사람들의 반응은 오히려 냉소적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오히려 억지 감정을 느끼지 않기를 원했다.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챈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에너지가 남아서인지, 좀 더 사회에서 잘하고 싶어서인지 조금 억지로 나의 감정의 흐름을 바꾸어보려는 시도를 했다. 물론 반응이 좋지 않아 2-3달 만에 접었지만.


물론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억지 공감과 억지 연결이 도움이 될 때가 더 많다. 그 사람의 느낌을 ‘공감이 간다-‘ 며 맞장구를 쳐준다면 좀 더 수월하다. 한국 사회는 무엇보다 집단의 힘이 강하기도 하고, 전체의 질서에서 어긋나면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같은 룰이나 이야기를 공유하지 않으면 소외되기 너무 좋으니까. 아무리 한국사회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네가 느낀 걸 내가 느껴야 해’라는 강요들, 부장님의 웃음에 같이 따라 웃고, 분노에는 눈치를 봐야 하는 흐름이 잔존하니까.


그렇지만 내가 나를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홀로 있는 시간에서는 내가 나의 감정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억지스럽게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가, 두려워질까 숨기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한 때는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내세우면 사회부적응자가 되지는 않을까, 윤리적인 부분들은 지키지 못하지는 않을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와 달라진 건 이 부분 같다. 10년간 이방인을 마음에 품고 살아오면서 느낀 건, 자신의 감정’만’ 내세우지 않으면 괜찮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도덕적으로 살아가려고 하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상대방의 마음과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예민한 감수성을 계속해서 표현하려고 하고, 내 표현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려고 시도한다. 다시 읽어봐도, 뒤집어 읽어봐도, 10년 후에 읽어봐도 카뮈가 나에게 말하는 건 자신이 느끼는 바에 대해 정직해지라는 말 같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여전히 자신 안의 소외받은 이방인들은 존재할 것이고, 세상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이방인들은 늘어날 것이다. 계속해서 이방인들은 늘어나고 있다. 비슷하게 겪는 사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자신만 겪는 사건과 상처들이 늘어나고 있다. 카뮈는 그때 이해받지 못하는 감수성을 가진 모든 이방인들에게 정직해지라고, 다른 감정을 가지는 건 잘못이 아니라고 책을 통해 말할 것 같다. 나는 과연 정직해질 수 있을까. 나의 정직함과 당신의 정직함이 연결되기를 기대하며. 내가 자연스럽게 당신의 이방성을 환대하기를 기대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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