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이 뭐길래 - 로컬에 대한 분석.
엘베에서 마주친 이웃과 인사하고 싶은 사람
로컬이 뭐길래 - 로컬에 대한 분석.
요즘 로컬이라는 말이 자주 쓰입니다. 로컬. 로컬라이제이션 등등의 이름으로도 요. 제가 꽤 오래 살았던 인천은 ‘인천스펙터클’이라는 인스타그램을 사용할 정도로 로컬 광고에 활발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어요. 분명 우리는 로컬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도 모여 살았거든요. 지역의 특색을 나타냈고, 자부심을 가졌죠. 하지만 고민했습니다. 왜 로컬일까.
이 질문을 좀 더 고민해 봤습니다. 그리고 제 주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봤어요. 그리고 거기 물음표를 붙였습니다. 여기서 남는 문장은 이거였어요. ‘로컬’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기 전에도 로컬은 존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왜 로컬일까.
여기서부터는 제 경험과 뇌피셜 그리고 약간의 근거들로 파악한 글입니다. 저는 여기서 ‘로컬’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게 된 현실과 상황을 다룹니다. 그리고 현재 상황을 다뤄보려고 해요. 제가 살아온 시간을 쭉 나열하며 해당 특징들을 보이고, 그에 대해 살을 붙여보겠습니다.
->2010년 이전
저희 할머니는 6.25 전쟁이 터지고 나서 평안도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곳은 현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이었어요. 거기 자리를 잡으시고 어연 74년이 지난 지금, 시흥시는 할머니의 삶이자 일부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마을 이장까지 지내셨죠. 물론 저희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 인천으로 이사 온 아버지는 똑같은 장소에서 25년째 카센터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적자를 내면서도 빚을 내서 자리를 지키고, 비즈니스 모델을 어느 정도 바꾸고, 급변하는 시도들을 하면서도 그 자리를 어떻게든 유지 중이시죠.
반대로 저는 이들의 인생과는 다릅니다.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끝내자마자 서울에 있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해요. 서대문에서 5년을 지내면서도 서울에서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삼성동, 뚝섬, 성수, 서울숲, 시간만 나면 가던 청계천과 신촌, 홍대. 그리고 취향을 따라 연남동에서 1년을 지내고, 현재는 광진구에서 6개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할머니, 아버지와는 다르게 성인이 되자마자 저는 정착지 없이 떠돌았습니다.
저는 이 차이는 ‘방랑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생긴다고 봅니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세대에서는 한 곳에 정착하려면 시간이 꽤 필요했습니다. (이런 표현으로 그 당시 낭만을 격하시키는 느낌이긴 합니다만)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삶의 ‘리소스’를 들여야만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떡을 돌리고, 행사가 나면 알려야 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머니가 빌라로 이사 왔을 적, 옆집과 아랫집에 저를 인사를 시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는 그 아주머니의 거북이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종종 과일과 음식을 나눠주셨어요.
그러나 제가 광진구 원룸 건물에 이사 왔을 때는 분위기가 달랐어요. 엘리베이터의 이웃을 보며 저는 목례했지만 그는 저를 이상하게 쳐다봤습니다. 물론 저는 섭섭하긴 했습니다만 저도 이상하다고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어쩌면 제가 이상했습니다. 같은 건물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목례를 하는 게 이젠 생각보다 이상해졌습니다. 이사를 오면 인사를 꼭 하면 좋겠다-는 문화에서, 이웃에게 건네는 목례가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까지 20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20년에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인터넷이 대중화입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당시의 이웃들은 육아부터 정보 교환, 물질 교환 심지어는 생계와 안전까지 책임졌습니다. 어제 싸운 이웃이 오늘 카센터에 손님으로 올 수 있었어요. 그 손님은 어제 내 아들이 집 열쇠를 잃어버려 저녁을 챙겨주며 카레를 먹여준 사람일 수도 있었죠. 물론 안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당시에 안전 역시, 주변 사람들이 책임져줘야 했습니다. 사건 사고가 생긴다고 해서 찍어서 올릴 인스타나 페북, SNS가 없었습니다. 도둑이 들거나 누군가 문을 따고 강제로 들어가려고 하면 대신 지켜줘야 했습니다. 폭행을 당해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이웃은 정말 많은 역할을 해줬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전과 생계까지도요. 물론 이외에도 지역 사람들은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이 예시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 지역교회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잠재적 소비자이자 보완관뿐만 아니라 마을의 땅 값, 경조사, 마을의 암묵적인 룰, 그리고 인생을 역전시킬 대박 아이템이나 정보까지 모두 마을기반의 네트워크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곳은 가장 사람이 많이 모였죠. 거기에 들어가면 안정감과 소비자와 심지어 놀이까지 있었으니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2009년 즈음, 스마트폰이 보급됩니다.
저는 이를 인터넷의 대중화라고 봅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자 그 여파로 인터넷이 대중화됩니다. 물론 스마트폰 전 에도 인터넷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이 인터넷이 일상 깊숙이 침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인터넷이 나오고 스마트폰 보급 전까지 과도기인 2002-2010년 당시만 하더라도 일상은 인터넷보다 강력했습니다. 인터넷 신문보다는 활자신문이 신빙성이 높았으며, 인터넷 구매보단 오프라인 구매가 훨씬 더 믿을만했어요. 특히 옷이나 신발같이 오래 써야 하는 상품 같은 경우, 직접 가서 구매하는 빈도가 높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보급되자 이 모든 것이 역전됩니다. 신문의 구독률은 인터넷의 대중화화 비례하여 내려갔을 뿐만 아니라 신뢰도, 가짜뉴스 등의 우려들은 언젠가 점점 작아졌습니다. 심지어는 인터넷 뉴스의 신빙성을 따졌던 40-50대들이 오히려 유튜브 뉴스를 더 많이 보는 상황까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오프라인-이웃의 역할은 당연히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2010년 이후 _ 코로나 이전
이젠 인터넷이 이웃의 역할을 대체합니다. 굳이 지역 거점을 택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안전과 생계는 인터넷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어제의 고객이 오늘의 고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비게이션과 지도가 발달했습니다. 외곽의 좋은 카페들은 네이버지도와 SNS에 추천됩니다. 또 멀리 나가기 위해 길을 헤맬 필요도, 차 뒤에 있는 지도 책자를 펼 필요도 없습니다. 옷이나 장신구, 신발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장에 가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웃은 생계를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소문을 타고 퍼지는 정보보다 인터넷이 훨씬 더 빠릅니다. 더 좋습니다. 대박아이템부터 연예계의 소문, 필수정보 등은 인터넷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역에 거점을 내릴 필요가 없다 보니 지역 중심의 소문과 정보도 점점 구심점을 잃고 사라집니다. 꼭 지역 거점을 거쳐야 하는 정보들은 네이버나 다음 카페들로 대체됩니다. 그것도 핵심정보만 있게끔, ‘맘’ 카페나 ‘육아’ 카페 등등으로 공통관심분모가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집니다.
무엇보다 안전도 인터넷이 그 역할을 합니다. 이웃이 담당했던 (좋은 의미에서의) 감시나 안전의 문제가 대체됩니다. SNS에 올라가는 영상과 감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생존처럼 드는 스마트폰은 과거의 DSLR보다 강력합니다. 한 번 올라간 영상은 소문보다 강력해 박제됩니다. 해당 영상은 증거로 남아 네이버 뉴스와 다음 뉴스 등으로 퍼집니다. 이제 서로는 서로의 안전을 담당합니다.
이 시기쯤 대학 내 선후배 관계가 재설정되는 것도 비슷한 영향이 있다고 봅니다.(완전히는 아니겠지만요) 이제 지역이나 도메인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리소스를 투입하지 않아도 정보나 지식, 인맥등을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언제든 떠날 수 있습니다. 또 어디든 떠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과거의 관습이 있기 때문에 저는 이 시기에 모두들 조금 주저하는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시기부터 지역 거점은 필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신기하게도 이 시점부터 세대 갈등이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게 핵심 원인은 아니겠지만 20대를 이 시기에 보낸 저는 아빠가 한 지역에서 25년을 장사한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한 지역에 70년 가까이 사신 할머니도요. 지금이야 이 고민을 하다 보니 그 결이 이해됐지만 더 큰 사업을 위해, 더 큰 확장을 위해 지역을 떠나는 건 그들을 배신하는 거라고 느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은 자신을 지켜줬던 사람이자, 소비자이자, 공동양육자이자, 가끔 일상의 지탱을 위해 돈을 꾸어줬던 친척이자, 정보를 줬던 좋은 지식인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는 지역 거점은 필수가 아니었어요. 역으로 어느 정도 외로워졌죠. 아들이 이사한다며 지역 친구들을 우르르 데려와 이삿짐을 옮기던 (이를 핑계로 사실 술 마시고 싶던) 아빠의 모습을 보며 저는 어느 정도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어요. 모두가 지역거점이었던 시기를 살던 그때는 이런 유대감이 생겼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주변에 인터넷을 통해 만난 친구들이 결혼까지 가는 경우도 종종 목격합니다.
실제적인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교회의 새 신자 이전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말씀드린 정보 전달이에요. 이전에는 지역에 정착하고자 하는 욕망과 네트워킹이 좀 더 강하다 보니, 이 교회의 ~~ 한 부분이 좋아서, 설교가 좋아서, 어떤 시스템이 좋아서 교회를 옮겼다는 말은 좀 이상한 말로 느껴졌다고 해요.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 왔다’는 말이 교회의 자존심을 깎는 말처럼 들린다고 합니다.
교회는 단편적인 예시이지만 이런 방향성은 단연 교회뿐만은 아닐 겁니다. 정보가 과잉되면 과잉될수록, 인간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더 좋은 정보를 취사 선택해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러니까 모임에 갔더니 어떤 정보가 있다-기보단, ‘나’를 위해 무언가에 참여했더니 사람들이 있다-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지역 계모임에 가면 정보를 얻고 정착을 쉽게 할 수 있을 거야- 에서, 등산을 위해, 헬스를 위해 나는 모임에 참여할 거야.로 무게중심이 바뀐 것 같습니다. 참여해서 얻는다- 에서 얻기 위해 참여한다- 로요. 사람들이 더 이상 ‘모임 그 자체’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연결로 바뀐 것이죠.
물론 개인의 거주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제가 떠오르는 예시는 ’ 00 지역 한 달 살기’에요. 인스타에 뜬 00 지역 한 달 살기는 그를 거기서 살도록 욕망하게 해요. 예전 같으면 지역에 적응하는 것도 어려웠던 1달을 가서 편하게 누리다 옵니다. 지역 거점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인터넷 때문일 겁니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음식점’ 버튼을 누르면 주면 음식점이 뜹니다. 카페를 누르면 카페가 뜹니다. 당근마켓을 누르면 이웃을 만들 수 있습니다. 멀리 친한 친구도 계속 카톡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모든 안정감이 존재합니다. 인터넷의 정보의 세계에는요. 그리고 이 개인화는 갑작스레 극한까지 가속화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