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전 직장에서 물류 가이드를 제작해 동료들에게 전수하던 중,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 방식은 곧 대체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이걸 더 효율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지금의 이 가이드를 직접 대체해 버려.”
내가 공들여 만든 매뉴얼이 곧 폐기될 것임을 알면서도 가르쳐야 하는 기묘한 허무함. 동시에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 조선시대의 문반들에게 “AI를 쓰면 더 방대한 지식을 더 창의적으로 조합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식을 쌓는 과정을 곧 인격을 닦는 과정으로 여겼던 그들에게, 결과물을 1초 만에 뽑아내 주는 기술은 어쩌면 '수련의 기회'를 앗아가는 야만적인 도구로 비치지 않았을까
이와 비슷하게, 어렸을 적 꽤 충격을 먹었던 장면이 있다. 다름 아닌, 완벽한 백자가 나왔을 때 그것을 바닥에 깨뜨리는 장면. 이를 보는 제자는 충격에 빠진다. 스승님 그것을 왜 깨뜨리십니까 하며-. 그러나 스승님은 묵묵부답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깨진 백자처럼, 제자 마냥 충격에 같이 빠졌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나타나기 이전, 성경의 필경사들은 자신의 노동의 자부심과 태도를 모두 중요시했다. 이태리 길드에 속해있던 장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는 서양보다 동양이 더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백자를 깨던 장인부터, 지식노동을 하던 양반 중에서 문반들, 단순히 무술을 야만의 영역으로 대한 것이 아닌 정신과 수련의 영역으로 대하던 무반들.
여기엔 분명, 무언가를 배우고, 무언가를 익히고, 무언가를 사랑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어디에 도달하겠다는 마음 아래 반복해서 숙련도를 높이고, 그 숙련도를 높이는 과정의 태도를 입각하는 과정에서 직업윤리가 발생한다. 요리사들의 주방의 청결은 숙련의 영역이자 동시에 윤리의 영역이며, 대장장이들이 불을 다루는 영역 역시 숙련의 영역이지만 안전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렇게 윤리는 노력과 배움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올 수 있다.
그러나 AI 시대가 되며 무언가를 배우고 익힌다는 말이 조금 어색해진다. 반복행동의 노동의 숙련도는 질문의 숙련도로 자리를 대체했는데, 질문을 ‘자주’하는 것이 과연 숙련도를 높이는가 생각해 보면 또 아니다. 한병철은 최근 저작 ‘신의 관하여’에서 의외로 ‘수동성’이나 ‘기다림’이 좋은 창조성을 가져다준다고 보는데, 이만 보더라도 과연 능동성이나 노력이 좋은 숙련도를 가져오느냐-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철학적 접근이 아닌, 결과적 접근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AI나 스타트업을 이끄는 인물들의 나이는 점점 고르게 분포되고 있으며, 경험과 경륜이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스포츠의 감독들 조차 점점 젊은 감독들이 성과를 내고 있는 형태를 보여준다. 최근 레버쿠젠을 무패로 우승시킨 사비알론소는 만으로 44세에 불과하며, 현 독일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나겔스만 감독은 38세에 불과하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노동 윤리와 인식의 변화는 당연하지만, 업무의 근본이 달라진 현재, 과연 직업에 대한 인식과 윤리는 어떻게 다뤄져야 할까. 특히 이는 고객을 대하는 방식과 노동자 스스로를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성경 필사를 하던 신부의 자부심과 경건함이 그랬고, 불을 조심히 다루는 대장장이가 그랬다.
그러나 이 생각이 다다를 무렵, 나에게 걸렸던 친구의 말이 있다.
“저 사람은 능력은 좋은데… 배울만은 한데, 배우고 싶지 않아…”
내가 말한 장인들은 태도와 능력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아쉽게도 근대화는 태도의 종말을 이끌어온 것 같다. 특유의 능력주의는 ‘능력이라면 내가 성격이 좋지 않아도 알아서 배운다’라는 기형적 관계를 생산해 냈고, 성격이 더러워도, 상대가 폭력을 행사해도 꾹 참고 배워야 하는 폭력의 관계를 만들었다. 물론 사람을 대하는 모습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과연 여기서, 이 관계가 더 이상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태도일지도 모른다.
AI 시대에 가장 위험한 상태는 기술이 바뀌는 속도에 내 정체성에 기술을 맡겨버리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능력 = 나 가 되면 첫째로 기술 = 나 가 돼버린다. “질문이 숙련도를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은, 단순히 프롬프트를 잘 입력하는 스킬에 매몰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이 시대의 생존 전략은 기술적 우위가 아닌 '태도의 재발견'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 층위로 나뉜다.
첫째는 인격적 태도다. "능력은 좋은데 배우고 싶지는 않다"는 말은 지식의 독점이 권력이 되던 시대의 유물이다. AI가 지식을 민주화한 지금, 고압적인 태도로 정보를 쥐고 흔드는 '실력 있는 폭군'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 타인과 어떻게 공명하고, 어떤 결의 인성을 가졌는지가 곧 그 사람의 고유한 브랜드가 된다.
둘째는 업(業)에 대한 태도다. 이는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다루는 도구와 데이터를 대하는 경건함, 그리고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함을 의미한다.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내 정체성을 기술에만 의탁하지 않고, 기술을 다루는 '나의 주체성'을 지키는 윤리적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 "어차피 곧 대체될 가이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허무주의다. 결과물만 놓고 본다면, 내일이면 폐기될 매뉴얼을 만드는 과정은 고통이자 자원 낭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점을 결과에서 과정으로 옮기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조선시대 문반들이 지식을 쌓으며 인격을 닦았듯, 우리에게 가이드를 만드는 행위는 단순한 문서 작성이 아니라 나의 사고를 논리적으로 구조화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수련' 그 자체가 된다. 매뉴얼은 폐기될지언정, 그 매뉴얼을 만들기 위해 고뇌하며 정교해진 나의 사고 체계는 내 안에 축적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추진력이 된다. 이 과정의 가치를 믿는 사람만이 허무주의의 늪을 건너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조직 내에서 강력한 신뢰를 구축한다. 일을 단순히 나를 증명하거나 남을 무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은 주변에 긴장과 불신을 뿌린다. 반면, 자신의 업을 사랑하고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타 팀에게도 명확한 신호(Signal)를 보낸다.
"이 사람은 자기 일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라는 확신이 들 때, 비로소 진정한 협업이 시작된다. 사람과 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태도는 AI가 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자산이다. 내가 만든 가이드가 내일 사라질지라도, 그 가이드를 만들기 위해 내가 쏟은 정성과 동료를 향한 배려는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숙련의 종말 이후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기능적 질문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가'라는 태도의 응답일 것이다. 그렇다면 20~30년 유지되는 가이드는 사라졌을지언정, 사람과 일을 대하는 사랑의 태도는 가장 오래가는 신뢰의 가이드가 되어주지 않을까? 새로운 시대, 새로운 노동에 대한 인식과 윤리는 우리에게 허무함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재창조하고 재 발견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