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마이너스 현실을 복구할 근사한 여행 계획

도피성 여행을 떠난 도비

by 랑방김삿갓



"1시간 안으로 3,529,000원 입금하세요."


반 백수에게는 새벽 같은 시간, 오전 10시에 걸려 온 전화.

나를 꿈의 나라로 데려가 줄 여행사 직원의 전화였다.

스페인, 포르투갈로 떠나고 싶으면 지금 당장 입금하란 말에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한 후, 보내준 계좌에 몽롱한 정신으로 돈을 보냈다.


입금하고 정신을 차려 침대에 걸터앉아보니,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 진절머리 나게 고루한 표현을 쓸 정도로 머릿속에는 열흘 전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

.

.

무명의 서비스지만 어째 회사 이름만큼은 제법 알려져 있는 기묘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도비.

한 달 내내 지하철 옥외 광고판과 SNS에서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비싼 상품들을 경품으로 걸 테니, 우리 서비스를 이용해 달라고 목이 터져라 읍소해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더니. 회장님의 행보로 인해 연일 뉴스에 메인 기사로 도배되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미디어에서 한 번쯤은 접해 본 서비스가 될 정도로 유명해져 버렸다. 한 마디로 사건이 터지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면 하는 서비스가 되어버린 거지.

스타트업은 대표 얼굴이 나오는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통한다더니, 통하긴 했다. 원하는 방향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 일 이후로 직원들은 퇴사 처리되었고, 회사는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이 출근길에는 '오늘은 아무 일 없으려나, 오늘은 이 부분까지는 마무리 지어놔야겠네.', 퇴근길에는 '뭘 알고나 시키는 거야? 사람은 더 뽑는다면서 왜 안 뽑고 미적거려.'등 혼자 구시렁대며 하루를 보내던 내가, 하루아침에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아침을 시작하고 저녁을 마무리하게 되다니.


별명이 로봇일 정도로 살면서 감정 표현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

.

.

당시 나는 눈물 콧물 흩뿌리고

"대한민국 회사 꽃까라 그래"를

외치며


무너져버린 자존감과 허탈함을 채우기 위해,

외국으로의 '도피'를 계획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나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고, 축하와 위로와 조롱이 뒤섞여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계산도 안 되는 생일파티를 한국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약속은 여행 뒤로 미루고,

최대한 빨리 한국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패키지여행'



스무 살 때 가족 여행으로 홍콩 패키지를 선택한 이후,

내 인생에 패키지여행은 없다고 선언했는데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고 나니 패키지여행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장 떠나고 싶은데 준비할 힘이 없었고,

누군가 내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가주기만을 바랬다.


눈알 굴리기와 손가락 까딱하기 정도의 힘은 남아있던 터라 침대에 누워서 여행사와 커뮤니티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최대한 멀리, 지금 당장, 백수니까 가성비 좋게,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몸을 혹사시켜 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패키지 발견. 망설이지 않고 바로 신청.

.

.

.

여행 전 날,

그러니까 내 생일날 정신없이 짐만 챙겼다.


24명이서 함께 하는 여행이라는 사실,

그리고 목적지의 음식은 한국인 입에 잘 맞으며

그곳의 햇빛은 사람을 구워버리니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만 알고 떠났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딱 3가지만 간절히 기도했다.


1. 여행 내내 1일 1 응아 하게 해 주세요.

2. 소매치기가 제 거지 같은 몰골보고 그냥 지나가게 해 주세요.

3. 한국에 돌아오면 여행 떠나기 전 겪은 사건은 기억 상실로 빠른 처리 부탁드려요.


여행 내내 마트 가듯이 성당을 자주 가서 그런지,

3번 소원은 70% 달성했지만 1,2번 소원은 기쁘게도 100% 이루어졌다.

.

.

.

비몽사몽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날,


공항에서 23명의 패키지 팸과 가이드를 만났고

조금도 설레지 않는 바르셀로나의 밤을 마주한 것이 당황스러웠다.



회사를 잘못 선택했던 것처럼, 이번 여행도 잘못 선택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