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제발, 제게 관심 갖지 말아 주세요

내향형 인간의 패키지여행

by 랑방김삿갓

3번 소원이었던 '(죽을 만큼) 굴려주세요.' 항목은 첫날부터 바로 이루어졌다.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깃발대장(가이드)과 23명의 전우들의 만남 이후, 숙소에 가기 위해 곧바로 투어 버스를 타고 바르셀로나의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난 동네로 향했다.


주어진 수면 시간은 3시간. 씻고 준비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딱 3시간이었다.

하루치 지불한 숙소를 대실 하듯 이용하고 본격적인 첫날 일정을 강행했다.


최종 목적지는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다시 바르셀로나 공항으로 돌아가, 국내선을 타고 말라가에 도착.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투어 버스를 타고 그라나다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Hola!"

전우들과 짝짓기 인사 후

본격적인 투어 시작



패키지여행의 암묵적인 룰. 홀수는 짝수로 만들어라.


국내선 탑승을 준비하며 전우들 중 3명의 홀수 팸과 처음 인사를 했다.

엄마, 딸, 이모가 꼭 붙어서 함께 하는 삼위일체 팀이었는데 혼자여서 홀수인 나와 여행 내내 짝을 지어 밥을 먹게 되었다.


사실, 혼자 하는 도피 여행을 계획했으니 패키지여행이라도 깃발대장을 잘 따라다니기만 하면 그만이지, 굳이 전우들과 어울리고 함께할 이유는 없었다. '어디서 왔나, 무슨 일 하나, 왜 혼자 왔나...' 등등의 질문을 받고 대충 얼버무리며 즐겁게 얘기할 마음의 여유 따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핵인싸 DNA를 타고 난 엄마와 정신과 육체 모두 풀근육인 딸,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모까지.

여행에서 처음 얘기하게 된 팀이고, 딸과 내가 비슷한 나이 또래라 이들에게 내 이야기를 꽤나 솔직하게 털어놓게 되었다. 가족 모두 개개인의 개성이 확실한 삼위일체 팀은 여행 기간 동안 패키지여행의 묘미를 알려주며 나에게 꽤나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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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착한 첫 관광지,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


역사적인 문화유산이 풍부한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도 손꼽히는 건축물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며 군사 요새로 지어졌다가 왕실의 거처도 되었다가 그 용도가 복합적이었다고. 크게 4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연회장으로 이용되었던 나르스 궁전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아름답지만 어쩐지 차량 맞은 알람브라 궁전 음악을 들으며 잠깐의 자유 시간 동안 나름의 여유를 만끽했다.

역시, 기억을 잊기에는 이국적인 풍경에 나를 던져버리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떠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방구석에서 뉴스를 보며 왜 하필 나에게 커리어가, 자존감이 무너지는 일이 생겼는지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자책의 시간을 가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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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새벽 4-5시에 토스트로 해결하고 7시간이 넘는 이동을 강행한 극한의 공복 투어!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나눠줄 바나나가 있냐고, 나 좀 살려달라고 빌어야 할 때 즈음 깃발 대장은

전우들에게 스페인식 첫 끼를 제공했다. 샐러드와 닭구이, 그리고 오렌지. 이 세 가지는 패키지여행 내내 밥과 김치처럼 계속 만나는 단골 음식이었다.



질긴 닭을 손으로 뜯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교양을 잃지 않은 채, 칼로 닭을 죽죽 찢어가며 주린 배를 겨우 채웠다. 식사를 하며 정신을 차리고 여기저기 둘러보니, 패키지여행 팸 대부분은 기념일을 맞이해 여행 오신 부부 팀이었고 친구 둘이 온 팀이나 엄마와 딸이 온 팀도 여럿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패키지여행에서 30대 초는 꽤나 어린 나이었다. 이런 강행군은 마음먹고 온 나도 힘든데 어르신들은 얼마나 힘드실지 오지랖의 감정이 조금 생겼지만, 어르신들은 내가 혼자 와서 외롭고 쓸쓸해 보였는지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왜 혼자 왔어?" "무슨 일해? 나이는? 어디 살아?" "나도 젊을 때 혼자 여행 많이 다녔는데, 나이 들고 결혼하고 하니까 저 사람(남편으로 추정)때문에 안돼." "혼자 오니까 심심하진 않아?"


일이나 회사 관련 질문은 대충 얼버무리고 길진 않지만 몇 마디의 대화를 하며 조금씩 얼굴도 익히기 시작했다. 자유 여행이었다면 정 심심할 때 밥 친구를 커뮤니티에서 일회성으로 구하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입에 거미줄 치고 다녔겠지만 사람들과의 소소한 대화는 패키지여행의 매력이 맞는 것 같다.


단, 좋은 사람들을 만날 경우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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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듯한 나,

같은 종족을 만나다


"저기야, MBTI가 뭐야?"


...?

MBTI를 묻는 어르신이라니. 삼위일체 팀의 일원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모'를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처음 제대로 마주했다. 주변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트레이닝복 차림과 염색하지 않은 흰머리. 그것 자체로도 흥미로웠는데 알고 보니 여자 축구를 취미 활동으로 오랫동안 하셨다고.


여행에서 본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성격이나 취미에서 나와 공통점이 많은 분이라고 느껴졌다. 은퇴 후 자유롭게 지내고 있는 모습도 내가 상상해 보는 나의 미래와 거의 90% 일치했다. 한적한 마을에, 미래에 나와 함께 할 누군가와 땅콩집을 짓고 소소한 일상으로 노후를 보내는 인생. 꽤 오래전부터 상상해 왔던 모습인데 이 길을 먼저 걸었던 어른을 보니 미래의 나와 마주한 느낌이랄까. 또래라면 내가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 우리 같은 종족입니까?"


낯선 곳에서 어딘가 익숙한, 나와 비슷한 종족을 보다니. 갑작스럽게 내 인생의 미리 보기를 한 것 같아 어째 느낌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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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인생도 나도 좀 비뚤어져 있으니, 말 시키지 말아 주세요'의 태도에서 같은 종족과 갑작스럽게 조우하며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고 주변을 보기 시작했다. 여행 끝무렵이 되어서야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하는 이 여행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첫날부터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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