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아름다운 스페인과 참혹한 패키지의 조화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행, 그리고 나

by 랑방김삿갓


론다로 이동하기 전 날, 깃발 대장은 고속도로에 덩그러니 위치한 귀곡 산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캐리어를 들고 계속 이동하며 먹을 것도 시원치 않았던 여행에, 잠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생겼는데 이 꿈이야말로 너무 성대해서 이룰 수 없는 목표였다.



너무 뜬금없는 위치의 귀곡산장은 그 앞에 거대한 똥(사람, 말 똥으로 추정했으나 개똥으로 밝혀져 파문)들이 가득했고, 룸컨디션은 숙소 앞 똥 못지 않게 벅차오르는 분노와 당황스러움을 안겨주었다.


5월 말의 스페인은 일교차가 꽤나 커 낮에는 매우 덥고 해가 완전히 떨어진 저녁에는 서늘한 편인데, 이 숙소는 스페인의 밤 기온보다도 더 낮아서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데다가 재채기만 해도 공동체 의식을 확실하게 심어주는 방음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혹시 주변이 무덤이라 실체없는 허연 것들이라도 왔다 갔나 왜 이렇게 숙소만 추웠을까. 라디에이터를 요청해 방에 들이긴 했지만 온도를 높이기엔 턱없이 덩치가 작은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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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둥 마는둥 하고 떠난 다음 일정. 대표 관광지가 된 누에보 다리와 역사 깊은 수도원과 숙소가 한데 모여있는 론다였다. 조금의 자비도 없이 수직으로 깎아지르는 절벽 위에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 숙소들의 조화가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누에보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절벽의 광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비하고 아름다운 스페인의 모습들 중 하나였다.



"자유시간 40분!"


모든 관광지에서 자유시간을 40분씩만 준다면 그 어떤 거지같은 방과 올드보이 군만두같이 매일 같은 음식을 준다 해도 베스트 패키지로 기억할텐데.


론다에서 얻은 40분의 자유 시간은 앞으로도 다른 관광지에서 이렇게 자유 시간을 여유있게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만들었고, 덕분에 시골 강아지처럼 신나게 구시가지 곳곳을 냄새맡으며 구경했다. 오래 된 수도원을 개조해 운영중인 숙소들과 그 숙소들 사이사이로 보이는 작은 카페. 조그마한 공원에서 기타 연주하는 할아버지와 그 옆에 펼쳐진 끝없는 들판. 어떤 불행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무조건적인 평화로움에, 스페인에 다시 방문한다면 반드시 론다에서 하루를 온전히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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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웠던 론다를 뒤로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달려 세비야에 도착. 스페인 광장과 세비야의 구시가지를 구경하며 저녁 일정 전까지 시간을 보냈다. 자유 시간 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깃발 대장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미친듯이 스타벅스로 달려가 아아메 한 잔 때리고 불멍하듯이 거리 구경을 하며 이번 여행의 장점만을 복기하는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이번 여행 잘 선택했다. 나는 행복하다. 잠을 잘 수 없는 환경, 삼시세끼 같은 음식...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내곁에 없었다면 열사병이 아니라 홧병때문에 저혈압이 치료됐을텐데 이건 아쉽네...'



마지막 일정으로 세비야의 밤을 플라멩고 공연 관람으로 마무리하는 건 꼬인 정신머리를 풀리게 만드는 한 줄기 햇살이었다. 세계 전통춤 중에 스페인의 플라멩고처럼 몸놀림이 뜨거우면서 박자를 똑똑하고 섬세하게 컨트롤하는 춤이 또 있을까? 별명이 예수인 공연 메인 댄서의 춤은 나에게 은총이 가득했다. 아멘.



이 와중에 패키지 팸 중 둘이 오신 어머님들이 공연을 보며 속닥속닥 나누는 이야기는 왜 이렇게 귀에 잘 들어오던지. 격렬하고 아름다운 댄서들의 몸짓을 보면서 귀로 사정없이 들어오는 대화에 혼자 낄낄대며 웃어버렸다.


A: 아이고 저거 무릎나가겄다. 힘이 얼마나 좋아야 저렇게 딱딱 소리가 여까지 나.

B: 힘이 아니고, 저 마루 바닥이 보통 마루 바닥이 아니여. 특수한거라 소리가 나는 거여.

A: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소리 내려면 특수 바닥이고 뭐고 무릎 아파.

B: 안아파!!!!! 소리는 바닥이 내는 거라니까. (...??)

A: 난 보기만 해도 아파. 무릎도 아프고 나 지금 허리도 아파. (갑자기 일어나서 플라멩고 대신 체조)


나도 공연의 열정과 아름다움보다 껑충 뛰어대는 출연자의 무릎 걱정에 내 무릎도 같이 시큰해지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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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지만 매일 잊고마는 진리.

값싸고 좋은 건 없다.


패키지의 부정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세상에 저렴하고 좋은 건 없으며 저렴한 걸 택했다면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유럽 여행은 나름 고관여 상품이라 기대를 완전히 내려눟을 수 없다는 함정이 있지.


패키지 여행을 선택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다. 누구나 알다시피 돈만 달라는 대로 주면 '스케줄'과 '치안'은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 단점이야 현지 상황에 따라 관광, 식사 스케줄의 변동이 있다는 것과 핵심 관광지를 가도 10분 구경하고 사진만 대충 찍는 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정도. 이러한 단점들도 사실 돈을 많이 내면 낼수록 서비스의 퀄리티가 소비자들이 허용 가능한 범위 내에 있기 때문에 만족도 하락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까, 적게 주면 낮은 퀄리티 많이 주면 높은 퀄리티를 보장하니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조금 더 내고 1위 여행사를 택하라는 것(제발)!!! 혹시 지금 홈쇼핑에서 ‘이 상품은 다시 없을 가성비 상품이니 지금 당장 전화 상담하라는 유럽 여행 패키지’를 보고 있다면 음소거하고 딱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


내가 이용한 여행사로 말할 것 같으면 필수로 포함되어야 하는 옵션인데 선택 옵션으로 빠져 선결제 금액 이외 현장에서 추가해야 하는 금액도 많고, 숙소는 한국에서 2만원짜리 여관 정도 수준이라 공짜로 자고 가라고 해도 필사적으로 마다해야 될 룸 컨디션. 맛없는 건 둘째치고 매번 같은 메뉴의 음식만 차려줘, 차라리 양상추만 식사로 주면 대성당에 뛰쳐들어가 감사 기도 올려야 할 수준의 식사 퀄리티를 제공한다.


나는 왜 평생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도 좋은 제품을 고르지 못하는가.

상술을 만들어 파는 직업을 가졌으면서 남의 상술에 왜 매번 넘어가는가.


숙소에서 혼자 밤을 보낼 때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잘못된 회사를 선택해 벌어진 일을 외면하기 위해, 여행을 선택했는데 어째 그 방법이 나에게 다른 방향으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작은 선택의 순간, 큰 선택의 순간 할 것 없이 모든 문제에서 나는 재주 좋게도 정답이 아닌 것만 쏙쏙 골라 선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여행이 반이나 남았는데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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