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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MTD Jul 03. 2024

홍해인이 성당 앞에서 오열한 이유

<눈물의 여왕>과 대상관계이론 #2

지난번 글에 이어서 눈물의 여왕과 대상관계이론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지난 글에서는 내사, 투사, 동일시와 같은 유아가 사용하는 심리기제를 중심으로 얘기해 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이론을 다뤄보겠다.


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의 두 자리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가지의 마음 상태가 있다. 편집분열적 자리와 우울적 자리이다. 아기는 최초에 편집분열적 자리에 위치한다고 한다. 여기서 '자리'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번역에 따라 '위치'라고 하기도 한다. 원문은 position인데, 단어를 쓰는 이유는 다른 발달이론처럼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한다'는 관점이 아닌, 언제든지 자리를 '왔다 갔다 한다'는 의미에서 자리이다. 가령 프로이트의 이론(구강기-항문기-남근기-잠재기-성기기)에서는 어떤 단계에서 이전 단계로 가는 것을 '퇴행'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클라인의 두 자리 이론에서는 퇴행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편집분열적 자리의 가장 큰 특징은 대상이 둘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이다. 대상을 '이상화'하거나 '평가절하'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대상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편집분열적 자리를 단순하게 '안 좋은' 단계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러한 모습은 생존과 관련된다. 나에게 이로운 경험을 주는 대상인지, 나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대상인지를 빨리 판단을 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좋은 대상경험을 통해 해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세상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형성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대상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는 유아의 특성을 두고 '부분 대상과 관계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통합된 대상으로서의 '엄마'가 아닌 부분 대상으로서의 '엄마의 젖가슴'과 관계 맺는다고 말한다. 성인의 경우 불쾌한 일을 경험하거나 관계의 갈등이 생겼을 때는 대화를 통해 서로 가지고 있던 오해를 풀 수 있다. 그러나 유아의 경우에는 상대방(주로 엄마)의 의도나 실수와 같은 드러나지 않은 정보들을 다 이해하거나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 자신 느낌에만 충실하게 대상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나를 기분 좋게 했을 경우에는 엄마를 '이상적인 젖가슴'으로 경험하며 대상을 마치 천사처럼 느낀다. 대상은 나쁜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고, 좋은 것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경험을 했을 때는 '박해하는 젖가슴'으로 경험하여 마치 악마처럼 생각한다. 이러한 모습이 과연 유아에게만 있을까? 아니다. 성인도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다 보면 악마 같은, 정말 저주를 퍼붓고 싶은 대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될 때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당시와는 조금 달라지기도 한다.


이런 경험들을  할 때 우리의 마음은 편집분열적 자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순간 대상은 정말 나를 괴롭게만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도 가만히 있지 않고 대상을 비난하고 공격성을 표출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들을 반복하다 보면(소위 연륜이 쌓이면)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어떤 다른 오해가 있지 않을까?' 혹은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행동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뭘까?' 더 나아가서는 '아 나의 이런  행동이 상대방에게 오해를 지 않았을까?'와 같은 태도를 가질 수도 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클라인이 말하는 우울적 자리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상이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 마음 상태인 것이다. 즉 "'좋은 젖가슴'이라는 것은 나의 환상이었구나"하면서 우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유아의 경우에도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다 보면 '아, 천사와 악마가 아니라 엄마라는 하나의 대상이구나'하면서 비로소 대상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이 생긴다. 이 우울적 자리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뤄보겠다.


편집분열적 자리의 모습을 해인이에게서 볼 수 있다. 백현우를 이상화하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해인이가 현우와 회사생활을 같이 할 때 사랑에 빠지게 된다. 드라마에서는 버스맨으로 나오게 된다. 매우 이상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될 때는 대상을 이상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 것 같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좋아 보이기도 하고, 내가 동경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편집분열적 자리의 또 다른 특징으로 편집증적인 모습이 있는데, 이는 해인이가 김민지에 대한 오해를 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현대에는 편집증이라는 용어보다는 망상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즉 대상이 악마라고 생하기 때문에 '대상은 나를 괴롭게 하는 존재다', '나를 속여서 나를 죽이려 한다' 이런 실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망상을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현우와 갈등 관계에 있을 때 해인이는 현우를 나쁜 젖가슴으로 경험한다. 나를 공격하고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정보들을 가지고 김민지와 바람을 폈다고 판단한다.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김민지를 찾아갔으나 그곳은 장례식장이었다. 매번 30만 원을 출금하고 그럴 때마다 꽃집에 들렀던 이유는 직원의 장례식장에 보내는 조의금과 화환 값이었다. 만약 해인이가 우울적 자리를 성취했을 때 같은 일을 겪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백현우는 나와 이혼을 결심할 정도로 매우 괴로운 시간을 겪고 있었구나, 그러나 이런 경조사를 아직까지 잘 챙기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을 보니 나를 사랑하는 마음도 여전히 있구나' 이런 식으로 대상의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이 공존할 수 있게 된 마음 상태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인간이 편집분열적 자리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프로이트 당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은 매우 논쟁적인 개념이었다. 이것이 '과연 실존하는가 아니면 허구의 개념인가'의 논쟁이다. 이것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이론과 학파들이 생기기도 했고, 이것에 동의하면서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것이 클라인의 시기심이라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유기체가 무기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라고 말했다. 이런 설명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오해가 바로 생긴다. 인간에게는 마치 자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오해이다. 그러나 죽음충동을 자살충동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완전한 잘못이다. 이 무기물로 돌아간다는 말은 '내적인 긴장과 자극을 줄이려고 한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가 본 인간의 욕구 충족 메커니즘을 알아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식욕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내 안에서 '배고프다'라는 긴장(자극, 욕구)이 올라온다. 이것을 사람 안에 보이지 않는 게이지가 있다고 생각해 보면 좋다. 음식을 먹지 않을 경우에는 그 게이지는 점점 차오른다. "출출하다> 배고프다> 너무 배고프다> 배고파 죽겠다" 마치 이런 식으로 그 게이지는 극에 달하고 결국 우리는 먹는 행위를 한다. 그러면 비로소 그 긴장(자극, 욕구)은 사라진다. 배고픔에 대한 게이지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간다. 이런 모습이 인간의 욕구충족 메커니즘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 게이지가 0으로 향하는 것이 죽음 충동이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이 더 이상 아무 욕구(자극, 긴장)가 올라오지 않을 때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게 가능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충동을 설명할 때 열반 원칙을 같이 말한다. 열반이라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 즉 무아의 상태, 아무런 번뇌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것에 빗대서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래서 '쾌락원칙 죽음충동에 봉사한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이다. 욕구가 올라오고 어떤 행위를 통해 그 긴장을 줄이는 과정(먹기, 잠자기, 섹스 등)에서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와 죽음충동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죽음충동을 자살충동이라고 곧바로 연결할 수는 없지만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충동보다는 죽음충동이 우세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과도하게 내적인 긴장을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게이지는 한계선까지 차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게 어떤 부분에서의 게이지인지는 케이스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을 낮출 방법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도한 긴장감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사는 것보다는 이 고통을 멈추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면 더 이상 이 고통(긴장)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론적이고 교과서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결국 그들이 겪는 실제적인 고통,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긴장의 정체가 무엇인지 는 것이 중요하고, 그 게이지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고통을 멈출 방법은 죽음 외에는 없다'라는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을 같이 겪어줄 사람이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들은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모습 또한 해인이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다. 해인이의 내적인 긴장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기억을 잃는다는 불안이다. 구체적으로는 '백현우와의 너무나 행복한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라는 긴장이었다. 물론 드라마이기 때문에 극적인 사건들이 있지만, 해인이에게 있어서 현우와의 기억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오빠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 사건으로 인해 큰 죄책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엄마라는 최초의 대상관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거절하는 엄마, 용납하지 않는 엄마, 박해하는 엄마 등 이런 부정적인 대상관계는 청소년기와 성인이 되어서도 모든 인간관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어느 누구와도 편안하고 행복한 관계를 맺어본 적 없었던 홍해인의 인생에서 백현우라는 인물은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주고 편안하게 관계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눈물의 여왕 성당 씬에서 해인이가 신 앞에서 고백하는 내용을 보면 '사랑받은 기억과 사랑한 기억만 있다'라고 한다. 그 기억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삶을 연장하는 수술을 받는 것보다 삶이 여기서 마치더라도, 그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성당 씬 이전에도 해인이는 상황이 악화되면, 점점 기억을 잃고 상태가 온전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현우가 자신 곁에 없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런 상태는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우울적 자리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해인이가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염려가 포함되어 있는 마음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죽음충동이라는 것이 외부 대상에게 향할 때는 대상을 파괴하려는 공격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클라인은 시기심이라고 했다. 좋은 대상을 파괴하려는 마음, 좋은 대상에게 감사가 아니라 오히려 공격성을 표출하는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민지 사건과 같은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현우는 그런 해인이의 공격에 무너지거나 포기하지 않고, 언제나 사랑을 주는 대상으로 견뎌준다. 그런 좋은 대상으로 버텨주었기 때문에 해인이는 좋은 대상경험을 내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죽음충동을 조금은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말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이나 대상(현우)을 파괴할 수도 있겠다는 또 다른 불안이 생겼기 때문에 마음 편히 현우의 이혼 취소 요청도 받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순수한 죽음충동이나 생명충동은 없고, 이 둘은 삶에서 얽히고설켜있는 것이라고 했다. 클라인 또한 삶이라는 것은 죽음충동과 생명충동의 갈등을 해결해 가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해인이의 죽음충동은 현우라는 대상경험과 사랑을 통해 많은 부분 극복된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자신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현우에게 큰 아픔과 고통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 있다. 해인이가 타고 있던 차가 사고가 나면서 해인이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오열하는 현우를 보면서이다. 다행히 해인이는 그 차에서 나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내가 수술을 받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대상에 대한 관심과 염려의 능력을 성취하며 비로소 우울적 자리로 이동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정리를 해보면, 해인이의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편집분열적 자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해 볼 수 있었고, 그 원인은 죽음충동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죽음 충동이라는 개념이 논쟁적이라는 것은 너무나 동의가 된다. 자살충동은 아니라고 해도 인간을 왠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존재로 보는 것 같은 껄끄러움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심리상담사로서는 죽음충동이라는 지식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그 해법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큰 이정표가 되어준다.


클라인 또한 생애 초기부터 너무 공격성을 강조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갓난아기가 편집증, 분열증이라는 게 웬 말이냐'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서 관계의 중요성을 말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클라인은 공격성만큼이나 사랑 또한 생애 초기부터 존재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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