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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농담 Jun 02. 2021

그 곡성은 곡성에 없지만

그 곡성이 그 곡성이냐 묻는다면 그 곡성, 바로 이 곡성이라 답하는 것

어, 거기 맞아. 
어, 안 무서워. 


※ 영화 《곡성》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언급해야 할 영화고, 써야 할 글이다. ‘그 곡성은 이 곡성에 없지만 이 곡성이 그 곡성이냐 물으신다면 바로 그곳이 이 곡성이요.’ 여기서 그 곡성은 영화 《곡성(哭聲)》을 말하고, 이 곡성은 영화의 배경이자 촬영지요, 내가 사는 전라남도 곡성(谷城)군을 말한다. 내가 곡성에 산다고 이야기하면 내게 물어올 질문을 알고 있고, 그다음 이어질 질문도 예측하여 대답할 수 있다. “어, 거기 맞아.”, “어, 안 무서워.” 개봉한 지 5년 가까이 됐는데도 백이면 백 영화 《곡성》의 그곳이냐는 질문, 그리고 거기 진짜 무섭냐는 질문을 받으니 매체의 힘이 새삼 대단하다 싶다.


곡성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만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것도 시원시원하게 마무리 짓지 않아 온갖 해석과 설명글이 들끓으니 장면이나 대사를 단편적으로 응용하는 건 어렵고, 그렇다고 앞뒤 맥락은 잊히고 대사만 남아 구천을 떠도는 ‘뭣이 중헌디’는 지겹다. 당장 <농담>을 처음 만들 때가 떠오른다. 어김없이 ‘뭣이 중헌디’가 이름 후보에 등장하고, 뭣이 중헌디가 뭣이 중허냐 따지다가, 저마다 드립을 살처럼 날리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회의실을 덮쳐오는 적막과 싸우던 때 말이다···. 아무튼 영화 《곡성》의 유명세에 비해 활용도는 떨어지고(?), 이를 대체할 수 있을 이야깃거리는 마땅히 없어 영 곤란하다.*


이 곡성과 그 곡성. 이 둘을 어떻게 맺어주면 좋을까?


* 더군다나 내게 이 영화와의 첫 만남은 상당한 스트레스로 남아있다.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처음 봤는데, 커다란 화면과 빵빵한 사운드,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전개 때문에 긴장한 상황에서, 같이 간 친구는 너무 무섭다며 영화 중간에 나를 버리고 혼자 상영관을 빠져나가기까지 했다. 나는 결말을 모르는 것이 더 무서워 친구를 따라 나가는 대신 결말을 기다렸는데,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도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난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 스트레스는 가중되었다. 관객이 느끼는 공포와 피로감이 실제 지역과 연관될까 봐 개봉 당시 많은 사람이 우려를 표하기도 했을 것이다(그래서 영화 제목에는 ‘곡하는 소리’라는 의미의 한자 ‘哭聲’이 붙었다). 



그 곡성은 곡성에 없지만
2016년에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哭聲)》은 낚싯바늘에 미끼를 꿰는 외지인의 손을 클로즈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장면이 만드는 축축하고 불쾌한 느낌은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이어진다. 곡성의 어느 마을에 낯선 외지인이 나타난 후 마을에는 의문의 연쇄살인이 계속되고, 경찰은 집단 야생 버섯 중독으로 판단하지만 모든 사건의 원인은 그 외지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간다. 주인공 ‘종구’는 딸 ‘효진’에게 문제의 증상이 나타나자 외지인을 쫓는 한편, 무속인을 불러들여 딸을 지키려 모든 수를 동원한다. 그러나 미끼를 앞에 두고 물까 말까 고민하는 물고기처럼 ‘종구’는 내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해진 운명인지 우연한 불행인지 아무튼 비극으로 보이는 어떤 결말로 영화는 흘러간다.


영화를 시작하니 익숙한 공간들이 튀어나온다. 곡성경찰서, 사랑병원 같은 관공서 건물과 그 앞 도로, 남원에서 읍내로 들어오는 길의 메타세쿼이아 길, 산속으로 굽이굽이 들어가는 도로··· 할리우드 영화에 3초 정도 스쳐 가는 한글 광고판을 짚어내듯 저기가 내가 아는 곳이 맞는지 짚어내고 있자니 ‘찐으로’ 곡성 사람이 된 기분이다. 여기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종구가 사는 영화 속 곡성은 영화적 상상력(과 도시 사람들이 으레 품는 편견을 살짝 덧대어) 빚어낸 가상의 시골 마을에 가까워 보인다. 실제 곡성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고, 석곡면 깊은 산 어딘가 외지인의 집 촬영장은 이제 관광지(?) 역할을 끝내고 정리했다니 그 곡성, 정말로 곡성에 없다.



그 곡성이 그 곡성이냐 묻는다면

그 곡성은 곡성에 없다며 실제 곡성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게 아마 가장 쉬운 대답인 것 같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섬진강 변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는 길, 맑은 날이면 골짜기를 따라 진 그림자까지 비춰내는 푸른 산, 걷는 걸음마다 따라 시원하게 흐르는 강,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산등성이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운치 있는 풍경···. 근데··· 이 대답도 이제 너무 심심하게 느껴진다. 정말 이것만이 곡성의 전부인가?


사실 내가 처음 곡성에 왔을 땐 추운 겨울이었는데, 도로를 덮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짙게 끼는 날이 꽤 많았다. 영화를 만든 나홍진 감독이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을지도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를 표현할 영화 속 공간으로 마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곡성의 풍경을 점찍었다고 밝혔는데** 굳이 심오한 이유가 아니라도, 저 산안개 자욱한 풍경을 목도하면 《리틀 포레스트》가 아니라 《곡성》을 구상하고 만든 것이 당연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천혜의 자연환경을 십분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아예 제2의 나홍진을 꿈꾸는 시네마키드, 사건을 일으키는 건지 해결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명탐정 코난(혹은 지망생)이 곡성에 오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깊고 오래된 비밀을 간직한 듯한 어둡고 푸른 숲, 온갖 거짓말과 속임수로 구성된 이야기와 이야기, 그러나 이를 돌파하는 우리의 주인공··· 신비한 자연환경은 언제든 스릴러 영화의 매력적인 소재를 제공한다. 어느 날부터 기차마을의 대관람차에 타는 사람은 있는데 내리는 사람은 없다거나, 안개 낀 도로를 달리고 달려도 안개는 걷히지 않고 목적지는 보이질 않고 네비게이션은 방향을 잃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거나···. 그러니 곳곳에 숨은 영감을 찾으러 일단 와보시게요······.

** “만약 초월적 존재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자연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밀집된 마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장소를 찾았고 곡성이야말로 인간과 신의 공존을 얘기하기에 가장 유리한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곡성의 풍경을 자주 풀숏으로 보여주는 건 그래서다.“ 씨네21(2016.05.18) “장르를 비틀기 위해서 가장 클리셰적인 종교가 필요했다 - 나홍진 감독 인터뷰”, http://www.cine21.com/news/view/?idx=0&mag_id=84127



그 곡성이 바로 이 곡성이라 답하는 것은

물론 곡성이 미스터리한 사건이 일어날 만한 장소로 적합하니 너도 일단 와보라는 대답은 아주 최악이다. 특히 미스터리한 사건을 진짜로 일으킬 생각이라면 더더욱 사절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곡성을 미스터리한 공간으로 소개하고 싶다. 단순히 사건이 일어나고,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낼 법한 공간이라서가 아니다. 영화 《곡성》은 여타의 스릴러처럼 결말을 향해 달려가며 의문이 모두 해결되기보다는, 결말을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그 기대를 무참히 거부하는 방식으로 보는 사람의 쾌감을 자극한다. 마지막 순간, 가지 말라는 말을 끝끝내 거부하고 집으로 달려가는 종구의 뒷모습이 생각나는가? 그 섬뜩하고 아찔한 선택의 순간이 꼭 우리네 삶의 모습과 닮았다.


단지 곡성만이 아니라 어디든 우리의 삶은 미스터리하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하는 행동의 의미는 무엇이고, 나와 관계 맺는 타인의 행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오늘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걸음은 그 뒤에 이어질 걸음을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하고, 내가 그럴 것이라 믿었던 모든 예측과 상상은 그럴듯하게 빗겨 나갈 것이다. 영화는 두 시간의 러닝타임이 지나면 끝을 예상할 수 있지만, 우리네 삶은 종지부가 어딜지 조차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 곡성은 미스터리한 곳이다. 나의 믿음을 저버리는 수많은 트릭과 생각지 못한 만남과, 매 순간 예상치 못한 충돌에서 뻗어 나가는 새로운 플롯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곡성은 곡성에 없지만 그 곡성이 그 곡성이냐 묻는다면, 너와 나의 살아가는 일이 모두 그 곡성과 같은 일이라고, 아주 미스터리한 답변을 돌려주리라.


사담 하나. 영화에서 가장 웃겼던 장면은 일본인 외지인이 장에 가서 손짓발짓을 동원해 닭을 구입하고, 걔네를 데리고 버스 탈 때였다. 돈계산도 겨우 하는 양반이 버스 시간표를 챙겨 보고 시간에 맞춰 버스에 탔을 걸 생각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읍내에서 장을 보고 터미널에서 출발했다면 사정은 더 복잡했을 거다. 기사님 없이 대기 중인 버스를 미리 탔다면 천 원짜리 지폐를 미리 내지 말고 소중하게 쥐고 있어야 한다. 기사님이 타면 돌아다니면서 천 원을 걷는데, 별다른 설명 없이 이뤄지는 그 모종의 시스템을 외지인은 무슨 수로 이해했을까. 더군다나 안내 방송은 이번 정류장만 알려주지 다음 정류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않는데, 별다른 문제 없이 닭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한 걸 보면 나름 착실하게 곡성 지역에 적응한 모양이다. 이쯤 되면 농어촌버스를 천 원 내고 탔을 외지인인지 아쿠마인지보다, 태연하게 우리 집 거실을 기어가는 다리 많은 벌레가 더 무서운 것 같다.



글 | 제소윤 

사진 | 조소은, 제소윤



본 콘텐츠는 웹매거진 농담(nongdam.kr) 6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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