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너답지 않아! 나다운 게 뭔데?
이건 건축에서 할 일이 아닌데?
인구감소 시대 건축의 대응방안에 대한 논의를 할 때면 흔히 듣게 되는 반응이다. 과연 “건축에서 할 일”이라는 것은 언제 정해진 걸까? 건축이 독립적인 직업으로 정착한 것은 산업화로 공간 수요가 폭증한 19세기로 불과 200년이 지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대량의 공간을 빠른 시간 내에 공급하기 위해 건축 직능을 설계, 시공, 감리 등으로 분업화하고 교육을 통해 각 분야를 고도화시켰다. 건축 직능은 도시화와 함께 크게 발달하여 많은 성과를 만들어 냈지만 최근 “짓는 건축”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건축수요의 근간은 인구와 재정이다. 점차 새로운 건물을 사용할 인구와 새로이 건물을 지을 재정적 여력이 감소하며 빈 건물이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러나 건축계는 여전히 전통적 건축 직능(Architectural profession)에 매몰돼 수요가 급감하는 “짓는 건축”에 매달리고 있다. 어쩌면 변화하는 시대에 발을 맞추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집착해 풍차와 자웅을 겨루는 몰락한 기사, 돈키호테가 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근대시기 건축의 변화를 주도한 요인이 과학과 기술이었다면, 현재의 건축은 인구 급감이라는 요인이 변화의 결정적 요소이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고속성장기를 전제로 형성된 좁은 건축의 틀 안에서 미래를 찾고자 한다면 건축 직능은 자연도태의 수순을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현재의 건축 교육과 건축 직능은 신규 건설이 성장기 도시 수준으로 유지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인구감소 속도가 근대화 시기의 인구증가 속도만큼 빠르게 진행되며, 신규 건설 수요보다 기존 건축물 활용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림픽 구호처럼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도시를 확장시키던 시기가 저물고, 새롭게 “짓는 건축”에서 기존의 자원을 “잇는 건축”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지는 것이다. 이제는 건축가가 빈 집, 빈 점포 등의 유휴공간에 경영, 부동산, 공유경제,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연결하고 설계, 시공, 운영 등의 역할을 통합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다. 분절되어 있던 프로세스와 지역자원을 “잇는” 르네상스맨과 같은 통합적 건축가 등장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후한의 몰락기 각 지에서 영웅이 등장하며 대륙의 지각변화를 이끌었던 삼국지 시대처럼 격변의 시대에는 시대의 변화를 먼저 감지한 선지자들이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곤 한다. 건축계에도 기존 건축 교육과 건축 직능의 한계를 체감한 젊은 층이 중심이 되어 전통적 건축 업역의 테두리를 벗어나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과 자원을 “잇는” 시도가 곳곳에서 속속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지역분석에서 시작한 문제 인식의 해법을 건축의 틀을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자유롭게 제시하며 건축 영역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건축의 생존을 모색한다. 도쿄R부동산의 공동대표인 하야시 아츠미가 주장한 “건축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건축가를 포기했다”는 말처럼 이제는 성장시대에 최적화된 “짓는” 건축의 틀을 버려야 건축의 미래가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 서에서는 건축 직능의 내외부를 연결하며 이를 비즈니스 모델화하여 지역을 기반으로 과잉 공급된 빈 집, 빈 점포를 재생하고 있는 그룹을 “도시재생스타트업”으로 정의한다. 이들은 어떻게 도시재생스타트업이 되었을까? 건축도시 스타트업 창업자는 학창 시절부터 직장생활까지 정해진 공식대로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현시대의 문제를 파악한 뒤 그에 맞는 해결방안을 직업으로 발명해 이를 실행해 왔다. 저성장 공급과잉 시대에 필요한 건축 교육과 직능의 변화 방향은 어쩌면 이들이 밟아온 과정에서의 성공, 실패담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산과 소유, 성장 위주의 가치관으로 무장했던 기성세대들과 구분하며 공유와 창조, 연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세대를 일컫는 “밀레니얼 세대”는 건축계에서도 태동하고 있다. 이들이 중심이 돼 활동하고 있는 “잇는” 건축 중심의 도시재생스타트업의 작동 원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계획이 힘을 발휘하는 때는 변수가 적을 때이다. 인구증가에 따른 신도시 수요가 거셌던 근대도시에서는 기존의 마을을 부수거나 원주민을 이주시킴으로서 변수를 지우고 계획가의 강력한 마스터플랜에 의해 도시를 만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빠른 도시공간의 공급이 우선 목표가 아닌 시대가 왔다. 이런 도시재생기에는 기존의 건물을 보존하고 기존 주민과 협의를 통해 기존의 역사, 문화 자원을 존중하면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마스터플랜을 충실히 수립하더라도 수많은 인적, 물리적, 역사적, 환경적 변수가 수시로 발생하고 여건이 변화하기 때문에 마스터플랜대로 일이 진행되기 어렵다. 도시재생기에는 큰 방향만을 설정한 유연하고 간소한 계획을 수립한 후 실행단계에서 그때그때의 변수에 맞춰 실행 주체가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실행 중심의 사업방식이 효과적이다.
점차 설계도에 의한 건축보다 설계도가 없는 소위 “건축가 없는 건축”의 사례가 많아질 것이다. 빈 땅에 건물을 신축할 때는 도면을 통한 설계가 효과적이지만, 이미 존재하는 건물을 리노베이션 하는 경우에는 도면에 의한 디자인보다 현장에서의 실시간 디자인이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현장설계란 현장에서 벽체를 철거하거나 구조물을 추가 삭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공간감과 재질감, 장면의 변화를 고려하며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영감을 실행에 옮기고 그 변화를 감지해가며 다음 작업방향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실제 건축도시 스타트업이 조성한 공간은 실시 도면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설계와 시공을 직접 현장에서 동기화하며 수행했기 때문이다.
설계자, 시공자, 운영자가 명확히 구분됐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설계자, 시공자, 운영자의 간극이 좁아지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공간의 성패는 어쩌면 설계자보다 운영자가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운영자의 취향과 캐릭터가 고스란히 반영된 공간을 조성하고 그 공간을 완성시키는 다양한 운영전략을 갖출 때 비로소 건축설계가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공간 운영자가 설계과정과 시공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설계자가 운영자의 관점에서 공간설계 이외에 판매, 홍보, 브랜딩까지 고려하는 새로운 작업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A, A’, A’‘, A’‘’ 등 유사한 일을 빠르게 반복해 생산성을 높이는 시기에는 실수가 적고 숙련화가 쉬운 안정적 대규모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나 A, B, C, D 등 늘 새로운 형국을 맞이하기 쉬운 재생기에는 빠른 의사결정과 업무 전환이 용이한 소규모 스타트업이 재생사업을 추진하기 용이하다. 각 사업마다 필요한 역량이 달라지고 각 사업에 따라 소요되는 전문가의 기간이 상이하기 때문에, 새롭게 필요한 업무영역이 발생하면 신설부서를 만드는 대규모 조직의 패턴과 달리 소규모 스타트업은 타 스타트업과 필요한 시기와 인력을 결합과 분리하며 사업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유연하고 자유로운 소규모 네트워킹형 조직구조를 지향한다.
대형 개발은 경제가 성장하며 사업에 대한 리스크가 적을 때 효과적이다. 그러나 인구감소와 저성장으로 인해 사업성에 대한 예측이 어려운 인구감소기에 대형 개발은 대규모 적자나 회복 불가능한 실패를 동반할 우려가 있다. 때문에 단기간 저예산으로 사업성을 현장에서 파악할 수 있는 다수의 소형 사회실험을 시도해보고 그중 가능성이 보이는 사업을 점차 확장해 가는 사업 추진 방식이 효과적이다.
* 건축도시공간연구소의 건축도시 스타트업(2017) 서문을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건축가 답지 않아", "연구자 답지 않아", "국책연구 답지 않아"
그건 너답지 않아!
그럼 나다운 게 뭔데!!?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XX 답다는 게 정해진 그때와
지금의 전제가 변했다면?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거 아닐까?
답게 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뭔지,
건축가다워야 하는 이유가 건축가다워야 하기 때문인가?
대전제부터 고민해야 할 시기지 않나 싶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건축가 다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모든
답지 않은 이들을 위한 서정시.
패턴화된 삶의 정답이 있던 시절을 지나
다양한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리드하는
답이 없는 시대에는
답지 않은 사람들이 길을 개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