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가봤지만 아무도 못 가본 포틀랜드
이 글은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Living Lab을 통한 DIT(Do It Together)빈집재생 생태계 구축 방안(윤주선 외, 2021)" 보고서와 제이커넥트 2021년 봄호의 "로컬크리에이터가 완성하는 마을생태계(윤주선, 2021)" 기고글을 수정•보완했다.
2021년 중소벤처기업부의 "로컬크리에이터(Local Creator)" 사업은 정책명이 "마을"만들기, "도시"재생 같은 장소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전환된 첫 사례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오랫동안 "운영자"의 전성시대를 외치던 입장에서 일단 반가웠다. 운영자 중심 정책의 첫 출항을 응원하면서도, 동시에 뱁새눈을 굴리며 정책의 빈틈을 살폈다. 10년 간 단련된 국책연구자의 괴팍한 습성이다.
가장 큰 우려는 공공이 오래 걸리고 성과 측정이 어려운 로컬 생태계는 뒷전에 두고, 성과 빠르고 자극적인 스타플레이어 키우기에 빠지지는 않을까이다. 지체 높은 나라님이 현장에 왔을 때 짧은 발표로 큰 임팩트를 줄 잘 길들여진 로컬크리에이터들의 번듯함에 중독되면, 동네는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생태계 구축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로컬에 이만큼 세금을 들이는 선진국은 없다. 우리도 찬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들 스타 로컬크리에이터가 자기 지역 내 관계망 관리를 소홀히 하고 타 지역 셀럽과 교류하는데 재미들이기 시작하면 더 큰 문제다. 로컬크리에이터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대자본과 경쟁할 수 있는 최종병기는 자기 지역에 기반한 점도 높은 마을 생태계 구축이기 때문이다.
(목표가 엑싯이라면 또 다른 얘기다. 유한한 자원인 토지·부동산 사업의 엑싯은 비정상적 땅값 상승을 의미한다. 무한한 자원을 다루는 기술창업에서의 엑싯과는 다른 차원 얘기다. 부동산 엑싯을 목표로 하는 사업가를 비난할 일은 아니나, 세금을 쏟을 일도 아니다.)
마을일은 개인이 아닌 팀 스포츠다. 혼자 빛나기보다 생태계를 구축해서 기꺼이 그 일부가 되려 움직이는지 여부에 따라 지속 가능성이 좌우된다. 스타플레이어 한 명을 하늘 위로 끌어올리는 수직축의 scale up보다는 그 영향력을 옆옆옆옆으로 퍼트리는 수평축의 spread out전략이 필요하다. 땅이 비옥해야 다음 해에도 풍작을 기대할 수 있다.
생태계는 1935년 아서 탄스리(A.G. Tansly)에 의해 처음 제안된 개념이다. 탄스리는『The use and abuse of vegetational terms and concepts』라는 저서에서 생태계 개념을 처음 제안했다. 그가 제안한 생태계는 "상호 작용하는 유기체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무기체 환경의 통합을 말하며 모든 생명이 그물(web)처럼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생태계가 구축되면 균형 잡힌 물질과 에너지 순환으로 장기간에 걸친 자기 유지 상태가 지속된다. 생태학적 입장에서 보면 모든 구성요소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전체 관계의 그물망 속 관계의 일부로 작동하는 것이다.
제임스 무어(Moore James F)는 1993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Predators and prey: A new ecology of competition"에서 생태학에서의 생태계 개념을 경제·경영학에 처음 도입했다. 이후 산업생태계, IT생태계, 기업생태계, 창업생태계 등으로 연결과 자원의 순환이라는 생태계 개념이 확산됐다. (ㅇㅇ생태계는 생각보다 최신 개념이다. 1993년은 이정재가 데뷔하고, 아이유가 태어난 해이다.)
나는 생태계의 핵심 개념을 호혜성, 연쇄성, 자발성으로 생각한다. 호혜성은 각 구성요소가 되돌려 받음에 대한 기대 없이 자연스레 하는 행위가 종국에 상호 혜택이 되는 상태를 말한다. 연쇄성은 상호 행위가 하나의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그 효과를 다음 사슬로 반복해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자발성은 각 주체의 연쇄 행위가 일상과 놀이의 일부가 되어 스스로 기꺼운 상태에서 촉발되는 것을 말한다.
마을 안에서 다수의 로컬크리에이터가 호혜성, 연쇄성, 자발성에 따라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끊임없이 주고받을 때 마을의 생명력이 살아나게 된다.
마을생태계가 작동하는(했던?) 대표적인 도시로 포틀랜드를 들 수 있다. 포틀랜드를 이해할 때 힙한 스페셜티 커피 로스터리, 수제맥주 브루어리, 독립서점 등을 개별적 로컬크리에이터 업체 단위로 바라본다면 포틀랜드를 절반만 이해하는 격이다. 포틀랜드를 다녀왔어도 "THE 포틀랜드"를 경험하진 못한 것이다.
포틀랜드의 진짜 가치는 이들 로컬크리에이터 간의 교류가 서로에게 영감이 되면서도, 서로서로 발주처이자 수행인이 되는 순환경제 마을생태계 구축에 있다. 에이스 호텔, 파웰북스, 리빌딩 센터 등 한국에도 많이 소개된 곳들 이외에 흥미로운 2곳의 소우주를 소개해 본다.
마을생태계를 생각하면 2018년 포틀랜드 출장에서 만난 포틀랜더 증 에그프레스(Egg Press)가 먼저 떠오른다. 에그프레스는 1999년 설립된 레터프레스 업체이다. 레터프레스는 가장 오래된 방식의 압력 인쇄기법으로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포틀랜드, 일본 등의 힙스터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에그프레스가 창업한 1999년에는 레터프레스를 쓰는 곳이 없어 무료로 기계를 받아올 정도였으나, 2000년대 후반부터 포틀랜드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레터프레스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지금은 감도 높은 젊은 층들 사이에서 레터프레스가 전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어 음반 표지, 가게 메뉴판, 엽서 등에서 널리 쓰인다. 수동으로 잉크를 발라 압력으로 인쇄하기에, 모든 인쇄개체가 각각 잉크뭍은 정도, 프레스 된 깊이감, 색상이 조금씩 다른 다양성과 고유성이 인기의 요인이다.
에그프레스 창업자 Tess Darrow는 나이키 텍스타일 디자이너 출신으로 레터프레스를 통한 지역 커뮤니티와의 연결을 가장 중요한 기업가치로 생각한다. 그녀는 지역 커뮤니티와의 연결과 이를 통한 문화적 공감대 형성이 결국 비즈니스로 이어진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회사에 있는 모든 기계는 업무 시간 외 레터프레스 취미반 주민들과 지역 학생들에게 무료로 대여해 준다. 레터프레스의 매력을 지역 주민에게 퍼트리지 않으면 수요자가 없어지므로 사업적으로도 불리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레터프레스를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일을 해야 매력적이고 위트 있는 상품이 나온다는 신념으로 에그프레스 직원에게도 근무시간을 포함한 모든 시간에 업무 관련 이외에도 스스로 만들고 싶은 레터프레스, 스텐실, 실크스크린 등의 작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장려한다.
문화를 넓히려 노력하는 지역 프레스샵들의 노력으로 포틀랜드 곳곳에서는 레터프레스로 인쇄한 손맛 나는 식당 메뉴판, 행사 포스터, 취미단체 zine 등을 접할 수 있다. 재능 있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했다. 순환경제의 물꼬는 문화생태계의 확산에서 나온다.
또 다른 사례로는 호손북스(Hawthorne Books)가 있다. 호손북스는 2001년에 포틀랜드로 이주한 독립출판사이다. 호손북스의 대표 리즈 크레인(Liz Crain)은 포틀랜드에서의 모든 아티스트는 경쟁자이자 동료라 말한다. 포틀랜드 세계관의 중심에는 공간 운영자들의 자연스러운 연결과 거기서 나오는 지속 가능한 새로움이 있다.
호손북스는 출판사이지만 5년째 로컬푸드 페스티벌을 기획·운영하고 있다. 출판사가 로컬푸드 페스티벌을 기획·운영하는 이유는 호손북스가 음식 관련 서적을 다수 출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식 관련 서적을 지속적으로 출판하기 위해서는 포틀랜드에 흥미로운 셰프들이 많아야 한다. 때문에 로컬푸드 페스티벌의 대상은 관광객보다는 오히려 실력 있고 개성 있는 타 지역 셰프들이다. 포틀랜드에 이토록 다양하고 좋은 재료들이 있으며, 획기적이고 도전적인 요리를 하는 셰프들과 그런 음식을 즐기는 시민들이 모여있다는 메시지를 타 지역 셰프들에게 전해 이들을 포틀랜드로 유입하는 것이 페스티벌의 목적이다.
호손북스는 페스티벌 이외에도 로컬 셰프들과의 메일링리스트를 통해 주기적으로 셰프들과 소통하고 지역 내 셰프들과의 네트워킹을 도모한다. 오프라인 모임을 정기적으로 개최해 창의적인 음식을 개발하도록 독려하고, 로컬 셰프들이 새로운 레스토랑을 오픈할 때는 함께 힘을 모아 팝업 레스토랑이나 마이크로 레스토랑을 열어 신규 점포 오픈 자금을 지원하는 모금 행사도 기획한다. 호손북스의 출판업을 중심으로 하는 로컬푸드 생태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포틀랜드 특유의 DIY 문화를 적용해서 각 셰프들과 이웃들이 각자 기르는 신선하고 잘 관리된 고품질의 채소, 닭, 달걀, 소, 돼지 등을 셰프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교환하고 이를 피클, 머스터드, 김치, 와인 등으로 만들어 나눠 쓸 수 있게 지원한다. 또한 이러한 식자재와 상품을 파머스마켓을 통해 유통하게도 도와준다. 로컬푸드의 생산-유통-제작-소비 전 과정을 출판사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작은 소우주에서 작동하는 마을생태계는 다른 소우주와 연쇄되기도 한다. 자원순환 생태계의 중심인 리빌딩센터에서 복원된 폐가구가 호손북스 페스티벌을 통해 이주한 도전적 셰프의 레스토랑에 쓰이고, 그 레스토랑의 팝업 행사에 에그프레스의 레터프레스 메뉴판이 등장하는 식이다. 탄탄한 마을 생태계가 마을 지속성을 높이는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 째는 서로가 서로의 발주처가 되어 동반성장이 가능한 점이다. 당장의 세련됨을 이유로 대도시에 발주를 넣거나 당장의 값쌈을 위해 중국·동남아에 발주를 넣게 되면, 마을의 인적자원은 성장할 영양분을 빼앗긴다. 서로가 서로의 발주처가 되어주며 동반성장하고, 서로에게 fit 하게 최적화되어 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마을은 인재들의 그물(web)을 가지게 되고, 대자본의 유입이나 외부환경의 변화에도 튼튼하게 버텨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우정, 존중, 실력에 대한 믿음, 뒤처지지 않으려는 열망은 필수다. 나와 전혀 다른 영역에 대한 지지와 당장 돈이 되지 않는 문화적 토양을 확장하는 일도 게을리하면 안 된다.
두 번째는 부가가치가 지역 내로 순환해 다음 턴이 생긴다는 점이다. 몇몇 스타 로컬크리에이터가 핫플레이스를 마을에 하나 둘 만든다고 그 지역이 활성화되긴 어렵다. 서울업체에 컨설팅, 브랜딩, 마스터플랜비를 주고 중국·동남아에 공산품비를 주어 만든 핫플레이스는 한 번의 미라클런에 그치기 쉽다. "마을생태계"에서 발생한 부가가치는 대도시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 내로 선순환해 마을 안에 새로운 프로젝트와 새로운 플레이어를 계속 등장시킨다.
물론 지금의 포틀랜드가 유토피아는 아니다. 포틀랜드는 코로나19 전후로 큰 임대료 상승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과 마약중독자, 홈리스로 인한 치안문제로 큰 곤경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마을생태계를 곳곳에 심어놓은 덕에 포틀랜드다움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2010~2018년 황금기의 포틀랜드가 이뤄 놓은 성취를 힌트로 더욱 탄탄한 마을생태계를 준비하는 일이다. 마을생태계의 토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일은 오래 걸리고 바로 성과가 나오지는 않지만, 마을과 도시와 국가의 비전을 생각한다면 꼭 해놓아야 하는 일이다. 갖은 변수에도 장기적으로 작동할 자가유지장치를 구축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하기 어렵다면 민간주도 민관협력 시대에 무얼 해야 할지 헤매고 있는 중앙과 지방정부가 맡아야 할 파트가 바로 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