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커피 산업의 네트워커, ‘웨이크블루’ 허린 대표의 이야기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엔 그렇게도 선생님들을 쫓아다녔다. 그들은 궁금한 건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가신 아이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수업을 어려워하는 친구들에게는 꼭 배운 걸 전해달라고 늘 덧붙여 말하곤 했다. 곁을 살피고, 헤매는 이들을 도우며 맞닿아 살아가야 한다는 건 그들이 전해 준 가장 귀중한 가르침이었다.
앞길만 보며 나아가기에도 벅찬 세상 속에서 선뜻 손을 내밀어 오는 자가 있다. 그는 따뜻한 가르침과 소중한 인연의 끈을 건네며 사람들을 잇는다. 단단히 엮인 매듭을 따라 이어진 이들과 발맞추어, 강릉의 커피 문화는 오늘도 한 걸음씩 나아간다.
모래를 적시는 푸른 물결처럼, 잔잔하나 창대한 연결의 가치를 전하는 허린의 작은 파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니 모습을 드러내는 카페 하나. “WAKEBLUE ROASTERS” – 큼직한 간판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부드러운 화이트 톤의 공간 사이사이 바다를 닮은 푸른색이 스며들어 있다. 시원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미소로 맞이하는, 카페 웨이크블루의 CEO이자 전(前) 강릉커피협회장 허린 대표와 인사를 나눈다.
# 파란(波瀾)의 서막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셨다고요. 타지에서 동문 선배를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가워요. 강릉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2014년에 처음 왔으니 이제 11년 차네요. 롯데백화점 공채 72기로 식품팀에서 커피와 와인을 담당하다가 일을 그만두고 강릉으로 오게 됐어요.
안정적인 대기업을 그만두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어떤 계기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나요?
백화점 영업관리직은 햇빛을 못 보는 직업이에요. 그 속에서 쉼 없이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어요. 청춘일 때 좋아하는 일에 뛰어들어 보자고 다짐한 순간 커피를 떠올렸죠. 당시에 커피 도시로 막 떠오르기 시작한 강릉으로 무작정 향했어요. 몇 년 동안 커피 관련 일을 배우다가 손수 만든 브랜드가 웨이크블루였습니다.
‘웨이크블루’라 이름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 안의 열정적인 블루(blue)를 깨우자는(wake-up) 의미로 지은 이름이에요. 파란색은 청춘과 희망을 상징한다고 하죠. 강릉이라 하면 바다의 푸른빛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흰 벽을 가리키며) 여기 붙어 있는 로고도 밀려오는 파도를 표현한 것이랍니다.
# 어제의 제자는 오늘의 스승이 되어
‘청춘’은 여전히 도전을 거듭하는 대표님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나요?
4년 동안 강릉커피협회장으로 일하다가 지난 2월 자리를 내려왔어요. 최근에는 강릉원주대학교 산업대학원 신소재공학과에서 커피 머신 소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커피 머신은 주로 수입 상품이어서, 국내 기업의 수출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꾸준히 배우려는 모습이 인상 깊어요. 학생으로서 배움을 이어가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선생으로도 살아간다고 들었어요. 어떤 가르침을 전하고 있나요?
강릉 시내권 최초의 커피 학원인 ‘웨이크블루 커피학원’의 원장으로서 10년째 강의하고 있어요. 요즘은 젊은 분들도 창업을 많이 하는데 강릉에는 아직 전문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이 많지 않아요. 제 지식과 노하우를 전하고 싶어서 사업을 시작했고, 그동안 교육과 창업 컨설팅을 통해 60개 정도의 카페 개업을 도와드렸어요. 가톨릭 관동대학교와 여성인력개발센터, 다문화센터 그리고 특수학급 학생들을 위해서도 강의하고 있고요. 배우면서 가르치는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네요. (웃음)
# 결속의 장, 강릉커피협회에서
(출처: 웨이크블루)
회장으로 있던 강릉커피협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2013년에 설립되어 올해로 12년 차네요. 제가 3대 회장이 되기 전까지는 커피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단순한 연합이었어요. 당시에도 강릉은 커피 도시라 불렸지만 내실이 다져지지 않았기에, 협회가 커피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조직이 되도록 힘썼습니다.
변혁을 이끌겠다는 의지가 놀라워요. 협회장으로서 어떤 혁신을 이룰 수 있었나요?
회원들이 자주 소통할 수 있도록 월간 시음 행사를 기획하고,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웰컴 키트도 만들었어요. 또 강릉에서 커피 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강조하며 교육을 제공하는 업체들을 서울에서 끌어올 수 있었죠. 이제는 강릉에서 동서나 흥국F&B, 셀플러스와 같은 중견기업의 교육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어요.
성장하려는 열정을 지닌 사람들에게 정말 좋은 기회네요. 협회에서 또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회원사 업주들이 모여 분기별 카페 트렌드를 분석하고 기획과 운영에 반영할 수 있어요. 또 서울에서 큰 카페 박람회가 열릴 때마다 함께 다녀오면서 연을 맺기도 해요. 협회는 로스팅 단체나 수입사 단체와도 협업하고 있고, 커피 관련 제품을 만드는 업체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다시 말해 협회는 '커피 하는’ 사람들의 소통과 결속의 장이 되어 주고 있군요.
네트워크가 없으면 혼자만의 고민에 그치고 말아요. 좋은 사람 옆에 좋은 사람이 모여들기 마련이고, 또 그 안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봐요. 어떻게 하면 강릉에서 전 세계를 표적으로 삼는 아이템을 만들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어요. 지금처럼 열심히 활동하다 보면, 전국의 커피 협회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이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 최초의 커피 축제, 그리고 강릉의 이면
강릉을 커피 도시로 브랜딩하는 데 ‘강릉커피축제’가 큰 힘이 되었다고 해요. 축제의 영향력을 체감하시나요?
축제 규모가 약 40만 명이에요. 서울의 가장 큰 박람회보다도 많은 인구가 유입되는 행사죠. 안목 커피 거리에서 시작되어 이목을 끌다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게 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하는 전국 축제에도 선정되었어요. ‘100인 100미 바리스타 핸드드립 퍼포먼스’라는 프로그램은 축제가 시작된 첫해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대표 행사가 되었고, 다회용 컵을 사용하거나 재생 용지로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의 움직임은 친환경 축제의 기조를 만들기도 했어요. 문화 행사의 기틀을 다진 축제라고 볼 수 있죠.
강릉 문화와 관광 산업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큰 의의를 지닌 행사네요. 강릉커피협회는 어떻게 축제를 지원하고 있나요?
협회는 축제 주관 기관인 강릉문화재단을 도와 행사 기획과 운영을 보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커피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해야 할 순간이 많거든요. 지난 제16회 축제에서는 국가와 품종이 서로 다른 커피를 구분해 내는 ‘강릉 컵테이스터스 챔피언십’의 운영을 도맡았어요. 축제 부스에 참여하느라 가게 문을 닫아야 하는 업주들을 위해 각 카페의 원두를 한 공간에서 판매하는 ‘원두점빵’ 사업도 진행했습니다. 또 축제장 한가운데에서 소상공인들의 음료와 디저트를 판매하는 ‘커피 & 디저트 마켓’도 운영했어요.
한편, 축제의 기획과 운영에 참여하며 발견한 문제점은 없었나요?
강릉은 양극화가 극심한 도시예요. 관광객이 몰리는 바닷가나 중앙시장은 융성하는 반면 도심은 그렇지 않거든요. 특히 커피 축제 기간에는 시내의 카페들은 매출이 20%나 감소합니다. 며칠 동안 가게 문을 닫아야 하니 무작정 축제에 참여할 수도 없는 처지였죠. 다행히 ‘원두점빵’처럼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니 시내의 업주들은 높은 일일 매출과 홍보 효과를 기대하고 축제에 참여하게 됐어요. 그러나 앞으로는 행사의 일시적인 효과에 의존하기보다 지역 전체에 커피와 관련된 콘텐츠를 더 많이 퍼뜨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양극화와 축제 효과의 일시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을까요?
강릉시와 개별 업체를 연결하는 협회의 역할이 중대할 거라고 봐요. 강릉 커피 문화와 산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업 기획안을 시에 전달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목소리를 내야 해요. 또 지역 주민들이 다양한 커피 콘텐츠를 접하게 하는 동시에, 업주들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실마리를 훑다
문제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까요. 강릉 커피 문화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커피 축제에서는 전문가들이 모이는 커피 포럼이 열려요. 업계의 가장 큰 이슈와 대응 방안을 논하게 되는데, 그런 토의는 축제 기간뿐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늘 이어져야 한다고 봐요. 이제 곧 부산에서 속초까지 KTX로 가는 길이 뚫릴 거예요. 강릉이 매력적인 콘텐츠를 확보하지 않으면 그저 스쳐 가는 도시가 되고 말 거라는 의미죠. 저는 강릉이 가장 잘하는 것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도시를 모방하기보다 강릉만의 뚜렷한 특색을 가져야만 찾아올 이유가 생긴다는 말씀이죠.
최근에 부산은 항구를 통해 커피 생두를 수입하고 있다는 사실로 국내 대표 커피 도시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해요. 물류 창고와 세관을 잘 갖추고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그에 반해 강릉은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죠. 커피 기계를 제조하는 데도 엄청난 자본이 들어가는데, 그런 시장을 양성하기에도 적합하지 않고요. 그렇다면 강릉이 다른 도시에 비해 무엇을 더 잘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겠죠. 답은 관광산업이에요.
관광도시라는 정체성이 커피 문화 진흥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요?
관광객의 수보다도 체류 시간을 늘려야 해요. 얼마나 오래 머물러서 다양한 콘텐츠를 향유하고 가는지가 중요합니다. 강릉시는 야간 관광을 활성화해 하루 묵고 가는 관광객을 늘리는 데 주목하고 있어요. 그러면 자연스레 카페를 찾는 수요도 늘어나겠죠. 두 번째로 차별화가 필요해요. 전국적인 인지도를 지닌 ‘테라로사’처럼, 강릉에서 커피를 하는 분들도 관광객을 겨냥해 저마다의 브랜드 정체성을 더욱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강릉의 차별화가 필요한 단계군요. 성장하고 있는 업체들에 도움을 줄 방법이 있을까요?
2024년에는 강릉의 커피를 고도화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강릉 커피산업 고도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강릉시와의 협업으로 ‘강릉 커피 분석 공정 센터’를 만들게 됐어요. 커피 업계 종사자는 물론 커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에요. 1천만 원대의 값비싼 로스터, 색채 감별기, 캡슐 포장 기계 등 다양한 장비를 만나볼 수 있어요. 센터의 설비를 활용한 상품을 전국적으로 판매하고 해외에도 수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강릉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는 점도 마음에 걸려요. 관광지와 시내, 격차를 좁힐 수 있을까요?
강릉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있어요. 안목 해변 거리의 땅값은 평당 1,500만 원을 넘겼습니다. 그걸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외곽으로 옮겨가면 결국 다른 상권이 활성화되겠죠. 그렇지만 저는 ‘다 같이 잘 살아갈 방법’을 계속 논의하고 싶어요. 바닷가를 찾아오는 관광객을 시내의 카페들로 인도하는 관광 코스를 만드는 것처럼요. 격차가 발생하는 경계를 파악하고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는 것이 핵심이라고 봐요.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긍정적인 순환이 일어나기를 바라는군요.
‘강릉 길감자’를 아시나요? 그 공간이 유명해지면서 유동 인구가 거의 없던 구석진 금은방 거리에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했어요. 하나의 움직임이 거리 전체를 바꾼 거죠. 그것이야말로 참된 도시재생의 사례라고 생각해요.
# 맞닿아 이어지는 힘
웨이크블루와 강릉커피협회의 수장으로서 걸어온 길, 그 너머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앞으로의 비전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전 강릉에 제 인생을 걸고 왔어요. 어떻게 하면 한 번뿐인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갈지 고민했죠. 강릉을 진정한 커피 도시로 만들자고 다짐하며 많은 일을 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려 합니다. 커피 학원에서 강의하고 협회장으로 일하며 중요성을 크게 체감한 건 네트워킹, 즉 ‘연결’이었어요. 새로운 사람들을 접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가르침을 전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이어 주는 강릉의 네트워커가 되려고 해요.
그동안 수많은 인연을 단단히 매듭지어 오신 것 같아요. 숱한 연결고리 속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가치가 있을까요.
‘개척하는 지성이 되자’라는 말을 종종 되뇌곤 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개척할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해요. 그 속도는 느리더라도 나아갈 방향만 정확하면 된다고 봐요. 어떻게 하면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지 늘 고민해야 합니다.
커피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편안한 공간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는 건 사람들을 연결해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에요. 거기다 커피는 석유 다음으로 무역량이 많은 재화라고 해요. 어찌 보면 전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거죠. 종종 해외여행을 가는데, 어느 카페에서나 제가 바리스타라고 말하면 무척 반가워하며 친절하게 대하곤 했어요. 커피 업계에 있는 사람들도 서로 유대감을 느끼는 거죠.
결국 연결의 가치와 연결되네요. (웃음) 마지막으로, 강릉에 와서 발견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어요.
아무래도 사람과의 만남인데, 그중에서 가장 소중한 건 강릉에서 만난 제 가족이겠죠.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변함없이 곁에서 지지해 주는 가족이 함께하니 참 든든합니다.
홀로 앞서가기보다 발맞추어 가는 것.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려는 우리가 진정 갖춰야 할 태도일지도 모른다. 함께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라난 온정은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이들에게 따스하게 전해진다. 가지처럼 하나둘 얽힌 인연 속에 피어날 꽃을 기다려 온 우리는 새하얀 모래사장 위에서도 싹을 틔우는 꿈을 꾼다. 떨어진 꽃잎마저 파도에 실려 저에게 남은 온기를 전해 주길 바라며.
강릉 커피 문화의 미래를 그리는 모두가 맞닿아 이어지기까지, 길잡이 허린의 푸른 물결은 오늘도 굽이친다.
글: <local.kit> 김서정 에디터
사진: <local.kit> 김서정, 오지민 에디터 / <웨이크블루> 허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