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아마코드, <로마>
<로마>, 2018, 알폰소 쿠아론
이 글에는 <로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글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먼저 영화를 관람하신 뒤에 글을 읽어주시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영화의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성취하며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쿠아론 감독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도 해리포터 시리즈 중 수작으로 평가받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나 <그래비티>의 감독이라고 말하면 보통 “아~ 그 영화를 찍은 감독이구나”라는 반응이 나오기 쉽다. 1991년작 <Solo con tu pareja>부터 지속적으로 임마누엘 루베츠키와 함께 작업한 쿠아론 감독은 ‘롱테이크’를 자신 영화의 한 특징으로 만들어내며 루베츠키 촬영감독과의 시너지를 극대화시켰다. 대표적으로 2013년의 <그래비티>에서 약 13분에 달하는 롱테이크 장면은 많은 평론가들과 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쿠아론 감독의 신작 <로마>는 조금 독특하게 보인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미래의 세상을, <그래비티>에서는 우주를 다뤘던 이 스케일 큰 감독의 신작이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로 향했기 때문이다. 올해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로마>는 넷플릭스 제작이라는 이유로 일부 배척되고 있지만, 오히려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 넷플릭스에 가입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로마는 65mm 필름과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보는 게 가장 좋은 영화지만!)
쿠아론의 <로마>는 펠리니의 <아마코드>와 연결된다. 쿠아론 감독은 영화의 제목이 <로마>인 이유를 영화의 배경이 멕시코 시티의 ‘로마 지구’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영화 제목의 글씨체나 영화의 내용 등을 보았을 때, <로마>는 <아마코드>에 대한 일종의 존경이자 오마주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펠리니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듯 펠리니 감독은 <8과 1/2> 이후로 영화 세계 자체에 큰 변화를 보인다. 소위 ‘후기’ 영화로 분류되는 그의 영화들(심지어 <로마>라는 제목의 영화도 있다.)은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아마코드>는 원어로 ‘Amarcord’이며 이는 로마 사투리로 ‘나는 기억한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영화는 펠리니가 기억하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펠리니 감독은 스튜디오를 매우 사랑했던 감독이기도 해서, 그 기억을 바탕으로 로마에 위치한 이탈리아 최고의 스튜디오 치네치타(Cinecittà)에 리미니를 만들어 촬영했다.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 또한 실제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억을 덧입힌 것들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영화에 등장하는 ‘Sabato fascista’라는 행사인데, 실제로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정권으로 이탈리아를 장악했을 당시에 매주 토요일마다 건강한 파시스트 양산을 목적으로 일종의 체육대회를 시행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마코드>와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
<로마> 또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유년시절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1970년부터 71년 사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멕시코 시티의 중산층 가족과 그 집의 유모인 클레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실제로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기억하는 그 당시의 멕시코시티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오랜 기간 멕시코를 떠나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영화를 만들던 감독은 이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찍었다. 쿠아론 감독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감독이 자신의 나라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많은 감독들은 본국에서 떠나 할리우드나 해외 자본과 함께 영화를 찍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 감독이 자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는 것은 영화인으로서의 성공의 척도이며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시·공간성이 중요하지 않은 판타지 영화나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주제에 대한 영화는 어떤 국가의 특수성이 중요해지지 않기 때문에 감독의 국적보다는 연출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는 종종 시의성이나 사회적인 함의를 담는다. 이러한 영화는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함이나 문제가 될 수 있는 지점을 다루기 때문에 ‘내셔널리티(nationality)’가 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하게 대두된다.
이 내셔널리티(nationality)는 종종 영화 속에서 핵심적으로 작용하여 한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많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그 직후 시기 영화들이 그랬고, 프랑스의 작가주의적 영화들, 대만 뉴웨이브의 영화(로디즈의 일원인 황다빈의 <공포분자> 글에서 잘 풀어내고 있다.)등 수많은 영화들이 그랬다.
나에게는 이탈리아 친구가 몇 명 있는데 친구들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이 문제를 종종 마주한다. 한 친구가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보고서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도대체 뭐가 재밌다는 거야?” 나는 친구에게 봉준호 감독이 사용한 영화 속의 말장난들과 <괴물>의 역사적 배경, 한국에서 밥을 먹는 행위의 중요성 등 친구의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지만 결국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마음으로 와 닿지는 않네”라고 답했다. 반대로 나는 이탈리아 친구들이 즐겨보는 영화나 드라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은 나에게 그 영화나 드라마들이 이탈리아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를 설명했지만 나 또한 마음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역사적으로 자국에서 영화를 찍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감독들도 있었다. ‘로디즈가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에서 한 번 다뤘었던 라울 루이즈 감독은 훗날 본국으로 돌아가 영화를 찍었지만 망명기간동안의 영화들은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묻어있었다. 러시아에서 추방당했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또한 고국을 늘 그리워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시 쿠아론 감독에게 돌아가보자. 그는 <로마>라는 영화를 만들 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1970년의 멕시코 시티를 재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이후 처음으로 루베츠키 촬영감독과 작업하지 않으면서 다른 영어권 촬영감독이 정서를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감독 본인이 직접 촬영을 겸하기도 했다. 물론 <로마>는 내셔널리티에 대한 이해가 없더라도 관객이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영화다.
나 또한 멕시코와 멕시코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로마>에서 다루는 주요한 사건들에 대해서만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성장을 주요 목표로 한 멕시코는 제도혁명당(PRI)의 일당 독재 아래서 1960년부터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 냈다. 이 때 멕시코의 많은 중산층들이 생겨났다. <로마>에서 가족의 아버지로 등장한 안토니오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2층집에 2명의 가정부를 둔 중산층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멕시코는 68년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70년 월드컵까지 유치시킨다. 영화 속에서는 아이의 방에 붙어있는 멕시코 월드컵 포스터를 통해 시대적 배경 또한 전달하고 있다.
한편 유럽에서 시작된 68혁명은 멕시코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8년 올림픽을 앞두고 학생운동에서부터 시작된 크고 작은 시위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졌으며 국가는 이들을 강경진압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68년 10월 2일의 대학살 사건이며, 정확한 사망자 수 또한 집계되지 않았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사건은 68년의 참사를 기리는 학생들의 시위였으며 이 당시 정부는 곤봉과 흉기를 가진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했다. 클레오가 아이를 위한 침대를 사러갔던 그날, 페르민을 만난 그날이다.
사실상 영화의 주인공은 클레오다. 클레오는 아이들의 또 다른 어머니로, 집의 가정부로 살아간다. 카메라는 클레오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거나, 클레오와 함께 이동한다. <로마>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많은 영화가 아니다. 패닝, 트래킹, 틸팅을 제외하고는 보통 정지된 카메라 속에서 인물들이 움직인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클레오와 함께하는 카메라의 이동이다. 트럭(truck)이라는 기법(카메라가 인물을 측면으로 촬영하며 트래킹하는 것)이 사용되는 순간은 카메라가 클레오를 놓치지 않겠다는 외침인 동시에 클레오에 대한 애정의 시선이다. 특히, 아이들이 바다에서 익사할 뻔 했을 때 이들을 구하러 가는 클레오의 움직임과 구하고 돌아와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를 안아줄 때까지의 움직임은 관객의 입장에서 클레오를 응원하게 만든다.
패닝(카메라가 좌, 우로 움직이는 것)은 주로 공간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된다. 그러나 공간은 보통 비어있지 않고, 그 속에서 인물들이 움직이며 공간을 채운다. 이 때에도 클레오가 움직이는 경우 카메라는 클레오의 동선에 맞춰 패닝하는 숏을 찾을 수 있다.
틸팅(카메라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은 영화 속에서 단 두 번 사용된다. 틸트 다운과 틸트 업이 한 번씩 사용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처음 틸트 다운이 사용되는 순간은 클레오의 양수가 터지는 순간이고, 틸트 업은 엔딩 시퀀스에서 클레오가 걸어 올라가는 때에 사용된다. 이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야기와 정확히 조응한다. 양수는 보통 새로운 생명의 출산을 의미하지만, 클레오의 아이는 죽은 채 태어난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틸트 다운은 죽음의 이미지와 결합한다. 반면 틸트 업은 바닷가에서 자신의 진심을 소피아와 아이들에게 고백하고 다시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은 클레오가 옥상으로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담기 위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카메라의 움직임은 중대한 사건 이후에 다시 ‘삶의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클레오를 담는 동시에 그를 응원하는 감정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
한 영화가 ‘좋다’고 느껴지는 때는 영화의 내용과 형식적인 면에서 모두 미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는 형식적인 면에 대해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내용적인 부분을 조금 다뤄보고자 한다.
영화는 1970년대의 멕시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마주한다. 클레오는 멕시코의 원주민으로, 백인 중산층의 집에서 가정부로서 일하고 있다. 안토니오와 소피아는 클레오에게 잘 대해주지만 차고에 개똥을 안 치워서, 냉장고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서 집안일을 잘 돌보지 않는다고 상처가 될 말을 뱉는다. 안토니오가 바람이 나서 집에 돌아오지 않게 되자 소피아의 감정에 따라 클레오가 혼나기도 한다. 안토니오의 바람과 클레오의 임신 이후 페르민의 도주 등 당시 가부장적 남성들이 얼마나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학생운동과 국가의 탄압을 영화 속에 배치시키며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도 보여준다.
<로마>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이 모든 사건들을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고백했고, 그 속에서 어떤 인물을 선택하여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주된 시점이자 극을 끌고 가는 인물은 클레오지만, 클레오는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단 한번, 해변에서의 숨 막히는 장면에서만 소피아와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할 뿐이다. 그럼에도 관객인 우리는 영화 속에서 무엇을 비판해야하는지 알 수 있다.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계급의 문제는 옳은지, 남성들의 무책임하고 비겁하기만 한 태도가 어떤 문제를 가져왔는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국가의 탄압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영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쿠아론 감독은 문제를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편 안토니오가 있을 때는 소파가 아니라 바닥에 앉아있던 클레오는 소피아의 옆에서 그를 위로하고, 소피아 또한 클레오를 돕는다. 클레오의 아이는 죽은 채 태어났고 소피아는 남편과 이혼을 결정한다. 그 뒤에 가족과 함께 떠난 바다여행에서 익사할 뻔한 아이들을 구한 클레오는 소피아와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서로를 꽉 안아준 이들은 이제 계급을 넘어서 하나의 가족이 된다. 클레오와 소피아는 무책임한 남성들로부터의 상처를 여성 간의 연대로서 극복한다.(소피아의 어머니 또한 이 연대 속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가족들은 바뀐 집의 구조를 맞이한다. 클레오는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두 사람 모두 연대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찾은 것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 속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어쩌면 작은 희망조차 찾기 어려웠던 1970년대 멕시코에서 자란 그가 피부로 체험한 희망의 씨앗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희망’을 찾는 방식은 그동안 쿠아론 감독이 영화를 만들던,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던 관점과도 일치한다. <칠드런 오브 맨>이나 <그래비티> 또한 영화의 결말부에 가서는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영화는 어둠 속에서 불씨를 찾아낸다.
이 외에도 영화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오갈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모든 이야기를 다루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느꼈던 지점들에 대해서만 적었음에도 꽤나 긴 글이 된 걸 보니, 아마 당분간은 <로마>의 여운에 쌓여있을 것 같다. 2018년 많은 좋은 영화들이 개봉했고 <로마> 또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애정이 가는 영화가 되었다.
넷플릭스는 올해 코엔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와 쿠아론 감독의 <로마>로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과연 넷플릭스 제작/배급 영화가 앞으로도 극장에 걸리지 못할까. 알폰소 쿠아론은 <로마>를 넷플릭스가 배급하는 대신, 넷플릭스가 자신의 영화를 틀 수 있는 환경이 구비된 영화관에서 이를 상영하는 조건을 걸었다. 베네치아 영화제와 이후 해외에서 개봉된 <로마>는 이 조건을 만족시키고 나서야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어쩌면 빠른 시일 안에 칸 영화제도 넷플릭스 영화들을 후보에 포함시키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상황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가치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이 중요시하는 가치에 따라 영화의 방점이 어디에 찍히는지가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 새로운 가족의 첫 걸음을 카메라가 틸트 업 하듯 우리 또한 응원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영화가 상황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말이 영화 속에서 감독의 주관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클레오의 입을 빌려 이 상황은 ‘나쁘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사회에 대한 감독의 생각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동시에 자신을 만들어 낸 당시의 사람들(사실상 여성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있다. 이 또한 펠리니의 영화들과 유사한 점이다.
+영화에서는 멕시코의 원주민 언어(미스텍어)와 스페인어(멕시코식), 그리고 영어가 나온다. 하지만 영어는 번역이 따로 되지 않는다. 영어권 관객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지겠지만, 비영어권 관객으로서는 의문이 들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멕시코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영어가 등장하는 것이 일종의 방해인 동시에 무의미한 내용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번역하지 않은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클레오 역할을 맡은 알리시아 아파리시오는 전문 배우가 아니며 쿠아론 감독의 이미지에 맞는 배우를 찾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비전문배우인만큼 연출에 있어서도 미리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았고, 영화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가정부인 아델라 또한 아파리시오의 실제 친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