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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Dec 28.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나선혜

맨체스터 바이 더 씨, 2016, 케네스 로너건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과거의 바다로 시작해서 현재의 바다로 끝나는 영화다. 영화는 과거의 바다에서 현재의 바다로 오기까지 벌어졌던 일들을 그리며 ‘리’에게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순에 따라 서사를 나열하는 식은 아니다. 영화는 정교하게 짜인 플롯 안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되는데, 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감정을 폭발시킬 뿐만 아니라 영화의 주제 역시 또렷하게 구현해낸다. 


   또한, 영화의 주제를 분명하게 하는 데에 플롯이라는 장치 이외에도 바다와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점 역시 눈에 띈다. 바다가 플롯의 진행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며 바다와 함께 깔리는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관객이 영화에서 마주하는 시각적, 청각적 경험을 플롯과 상응시키면서 영화가 던지는 주제는 한층 무겁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플롯, 바다, 음악. 이 세 가지의 요소가 결합해 우리에게 보내고자 했던 메시지에 주목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영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저마다 어깨에 짐을 짊어진 채로 살아간다


   아내, 세 아이와 함께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던 리는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 실수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만한 것이었고, 그렇게 리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떠나 보스턴의 단칸방에서 살아가게 된다. 모든 것을 겪어낸 후의 리의 눈빛에는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다.


   리의 비극을 보면서 어째서 그에게만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이 벌어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영화는 리의 비극적인 사건을 중심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우리 모두 저마다의 비극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쪽에 가깝다.


   저마다의 비극, 저마다의 짐은 영화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표현된다. 리의 전 부인인 ‘랜디’의 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이나 리의 조카인 ‘패트릭’이 냉장고 앞에서 공황증상을 겪는 장면이 그러하다. 리에게 잔인한 말들을 퍼부었을 랜디였지만,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녀가 진 짐은 무거웠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시큰둥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던 패트릭도 아버지가 겨우내 냉동고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견디지 못한 채 무너진다.


   이는 주변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리의 형 ‘조’는 리와 패트릭을 인생의 과제처럼 여겼기에 어떤 상의도 없이 리에게 후견인 자리를 맡겼을 것이다. 지독한 술꾼이었던 리의 형수는 독실한 기독교인과 재혼을 앞두고 있지만,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어 다시금 술을 찾는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과거와 술이 평생의 짐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렇듯 저마다 어깨에 짐을 얹은 채 살아간다는 것, 누구도 그 짐을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요약하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영화의 막바지에 장례식을 마친 리와 패트릭이 야구공을 튀기며 길을 걷는 장면이다. 우리 각자의 어깨에 얹힌 짐은 이 야구공과도 같다. 그저 길가에 있기에 주웠을 뿐인데, 아무리 바닥으로 내리쳐도 다시 튀어 오르고 ‘내버려둬(Let it go)’라고 해도 누군가가 쥐어다 주는 그런 야구공.


   영화는 어떤 인생이든 그렇게 끊임없이 뒤따라오는 야구공 하나쯤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야구공의 무게에 대해서 그 어떤 섣부른 위로도 건네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이 그 야구공을, 그 짐을 지고 가는 모양새를 지켜볼 뿐이다. 아무런 말없이 육지를 바라보는 바다처럼.

같은 실수는 반복되고 삶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바다를 보여주며 페이드아웃이 되고 영화가 끝났음에도, 리의 인생은 변함없이 계속되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는 ‘리’라는 인물에서 관객이 그 어떤 극적인 해소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건을 해결하고 이로써 관객에게 해소감을 주는 과정을 포기하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나 예상하는 서사적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이 쉬운 것일 리 없다.


   하지만 영화는 당연하다는 듯이 예정된 서사 전개를 마다한다.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어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머무는, 혹은 적어도 이를 암시하는 서사를 포기하는 것이다. 대신 리는 보스턴으로 돌아가 다시금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실제적인 후견인 자리는 조지 부부에게 맡긴다는 결말을 선택한다.


   이렇게 전형적인 서사에서 벗어난 결말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인생이기 때문에’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실수가 반복되는 이상 인생은 같은 모습인 채로 흘러간다. 리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리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러 모든 걸 잃었음에도 여전히 실수를 되풀이한다. 자신이 주차한 장소를 잊어서 길을 헤매고, 심지어 불(!) 위에 올려둔 음식을 깜빡하는 바람에 온 집안이 연기로 가득 찬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실수는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보스턴으로 돌아가겠다는 리의 선택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실수로 세 아이를 잃고 다시금 한 아이의 후견인이 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은 과거의 실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 실수가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실수를 저지를 것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은 흡사 현실의 우리와도 같다.


이렇듯 영화는 서사가 극적으로 해소되는 순간을 함부로 그려내지 않는다. 오히려 선택 앞에서 주저하고 제자리를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써 영화는 현실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며, 현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단순한 드라마로 여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의 삶이 (혹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결국 우리들의 삶과 겹쳐지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 무게를 쉽게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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