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공포영화로서의 <벌집의 정령>, 표국청
벌집의 정령, 1973, 빅토르 에리세
언젠가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면 이 영화부터 시작하리라 마음먹은 영화가 있다.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벌집의 정령>이 바로 그 영화다. 영화를 처음 만난 것은 2015년이었다.
당시의 나는 영화를 정말 막무가내로 보았기 때문에 한 영화를 보고 또 다른 한 영화를 보는, 말 그대로 그냥 영화를 보기만 하고 넘어가는 생활을 했었다. 많은 수의 영화를 봐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2017년에 학교 수업 중 이 영화를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나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갈 무렵에야 이 영화를 내가 이미 한 번 보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때문에 첫 번째 만남보다는 두 번째 만남이 나에게는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된 순간으로 기억된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두 번째 만남 이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으나 어째서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수업의 일환으로 보았던 영화이기 때문에 이 영화가 스페인 내전의 역사와 프랑코 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조금 더 본질적으로 이 영화가 가지는 이미지의 어떤 지점이 나를 흔들리게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후 영화를 두 차례 더 보았고 어제(2019년 2월 12일) 서울아트시네마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벌집의 정령>을 다섯 번째로 만났다. 사실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기에는 다섯 번이라는 관람의 횟수가 부족해 보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찌 되었든 다섯 번째 만에 내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이 영화를 왜 사랑하는지에 대해 스스로의 생각을 글로 풀어낼 마음이 들었다는 것 또한 중요한 사실일 것이다.
본 글에서는 <벌집의 정령>이 가지고 있는 사회성과 지역성을 벗어나서 영화가 가지는 그 정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 지역성을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영화 자체에 대한 기만일 수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철저히 내가 이 영화에게 끌리는 지점에 대해 서술하는 글이기에 이 부분은 읽는 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벌집의 정령>을 보면서 느껴지는 가장 큰 감각은 ‘공포’이다. 조금 더 세밀하게 파고들자면 그 공포의 근원은 ‘타자’와 ‘불안’이다. 영화는 적어도 세 명이상의 타자를 등장시킨다. 아나와 이사벨이 영화의 시작점에서 만나게 되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영화 속 ‘괴물’과 영화의 후반부에서 아나가 만나게 되는, 기차에서 뛰어내린 ‘낯선 남자’, 그리고 아나의 엄마가 편지를 쓰는 대상. 결과적으로 타자는 기득권을 흔드는 존재들이다.
좋게 말하면 변화를 촉발하는 집단이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혼란을 야기하는 집단이다. 중요한 것은 어찌 되었든 타자들이 서있는 지점이 원의 바깥이라는 점이다. 이미 정립된 것, 안정적인 것의 밖에 서있는 자들이다. 때문에 타자는, 비록 그것이 올바른 혼란 또는 변화일지라도 존재만으로 원 안에 있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타자의 전형이다. 욕망에 의해 태어난 존재이며 그 욕망은 인류의 안정성을 흔드는 욕망이었다. 또한 타자인 자신을 유일하게 수용한 존재를 스스로의 손으로 파괴하는 비극의 전형이기도 하다. <벌집의 정령>은 의도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이미지를 사용한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아나가 <프랑켄슈타인>을 만나고 던지는 의문은 어째서 괴물이 사람들을 죽였는가, 그리고 괴물은 왜 죽었는가?이다.
아나는 타자의 죽음에 의문부호를 붙일 수 있는 순수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 순수한 존재가 무수히 타자를 죽여 나가는 사회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영화의 시작점부터 느껴지는 답답함의 정체이다.
이사벨은 그런 질문을 하는 아나에게 영화는 모두 허구이고 때문에 괴물은 죽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영화 속 죽음의 이미지가 모두 거짓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에 더해 괴물은 정령이며 정령은 친해진다면 언제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이사벨의 이 말은 아나에게 큰 영향을 미쳐 아나로 하여금 정령을 찾아 나서게 만든다. 아나는 무의식적으로 타자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타자로 볼 수 있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며 등장하는 ‘낯선 남자’는 그런 타자를 찾아 나선 아나가 발견한 타자이다. 영화 속의 언어들로 풀이하자면 그 남자는 아나가 발견한 정령인 것이다. 이사벨이 말했던 괴물의 거처에서 발견되었으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때문에 한 번에 마음을 줄 수 있는 존재.
재미있는 것은 이미 아나가 낯선 남자를 발견하기 전 이미 정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조금 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중요한 것은 이 낯선 남자가 ‘누군가’에 의해 사살당한다는 점이다. 아나와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이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남자는 영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타자이다.
어떤 의견을 스크린 안에서 꺼내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캐릭터는 그 죽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나에게 있어서 큰 충격이다. 정령을 발견했다고 믿었으나 그 정령은 사람들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분명히 허구여야 할 정령의 죽음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는 아나로 하여금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세 번째로 언급하는 아나의 엄마가 편지를 보내는 대상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는 아나의 엄마가 편지를 쓰는 장면, 기차에 편지를 넣는 장면, 아나가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장면 등에서 이 캐릭터에 대한 단서들을 제시하는데, 정확한 정보 값이 드러나지도 않고 영화에 직접 등장하지도 않지만 아마도 이 편지의 수신인이 두 번째로 언급된 낯선 남자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영화 속에서 타자들은 괴물로 변신하여 (이사벨은 아나에게 괴물은 정령이 변장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변장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등장하거나 등장하자마자 죽임을 당하거나 등장조차 하지 못 한다. 그리고 이 타자들의 존재는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함과 불안함 그리고 슬픔을 스크린 밖으로 던진다. 이 모든 감정이 섞였을 때 느껴지는 것은 공포이다. 때문에 <벌집의 정령>은 잘 만든 공포영화라고 볼 수 있다. 타자라는 존재를 이렇게 잘 다룬 영화는 드물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아나가 낯선 남자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정령과 대화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점은 어디까지나 비약이지만 바로 ‘이사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사벨은 극 중에서 아나의 자매로 등장하고 영화관(마을회관 혹은 비슷한 건물이겠지만.)이나 학교에서도 함께 등장한다. 물론 처음부터 이사벨이 정령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사벨은 학교에서 아나 이외의 존재에게 이름이 불리기도 하였으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이사벨은 살아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사벨이 정령이 되는 시점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유리창 앞에 쓰러져있는 이사벨과 그런 이사벨이 죽은 척 장난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긴 아나가 이사벨을 계속 깨우려고 하는 씬에서부터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나가 가정부인 밀그로스를 찾기 위해 밖에 나갔다 다시 안으로 돌아왔을 때 이사벨은 사라져 있고 창밖을 바라보는 아나의 눈을 가리며 놀라게 하는 장난을 치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이 장면들의 시작점을 돌이켜보자.
고양이의 목을 조르다 고양이에게 물린 손가락에서 새어 나온 피로 자신의 입술을 칠하는 이사벨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다음으로 아나의 아빠가 사용하는 서재에 걸려있는 그림으로 이동한다.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지만 바니타스 정물화를 떠올리게끔 만드는 그림의 한쪽 구석에 있는 해골의 모습이 도드라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로운 비명. 쓰러져있는 이사벨. (물론 이사벨이 숨 쉬는 모습이 장면 내내 보이기는 하지만.) 이사벨을 살리기 위해 가정부를 찾아 나서는 아나, 사라진 이사벨, 아나의 눈을 가리며 장난치는 이사벨.
이후 이사벨은 아나 이외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시선도 받지 못하고 이름도 불리지 않는다. 계속해서 아나와 함께 등장하지만 그 빈도도 사건 이전과 비교하여 굉장히 적다. 만약 이사벨이 이때 죽음을 맞이한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아나의 부름에만 응답하는 정령이 된 것이라면, 그 이전에 아나만의 환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병들어 누워있는 아나에게 찾아온 이사벨은 이불과 베개가 없는, 매트만 남은 앙상한 침대에 앉는다.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하얀 이불이 깔려있던 두 개의 침대 중 하나의 침대에만 이불이 없다. 더 이상 그 침대에서 잠들 사람이 없다는 의미는 아닐까?
만약 이사벨이 정말 죽음을 맞이한 것이라면 아나는 이사벨을 정령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사벨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그런 환상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다.
이처럼 영화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활용하는 서사를 통해 아나의 심리를 전진시킨다. 프랑켄슈타인과 소녀의 죽음이 아나가 목격한 첫 번째 죽음이고 두 번째는 이사벨의 죽음, 이후 낯선 남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 죽음들은 영화 전반에 유령성을 덧입힌다. 아나의 속에서 살아있는 모든 자들은 죽는다. 그리고 이에 더해 영화는 아나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다.
낯선 남자의 죽음 이후 아나가 건네준 재킷 때문에 아나의 아빠는 타자의 집단과 엮여 있는 것이 아니냐는 기득권층의 의심을 사게 된다. 이후 아나는 낯선 남자가 죽음을 맞이한 현장을 가서 그의 피를 보게 되고 아빠의 부름을 외면한 채 달아난다. 숲으로 달아난 아나는 버섯을 보게 되고 이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만나게 된다.
이후 아나는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고 의사에 의해 치료를 받고 잠도 자고 물도 마시게 되지만 결과적으로 과연 아나가 살아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이는 ‘유사 죽음’이다. 아마 아나는 버섯을 먹었을 것이고 그 환각에 의해 괴물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던 시점에서 아나는 주변을 살핀다. 자신이 괴물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은 것에 대한 의아함을 나타낸다.
아나는 영화의 끝에서 유리창의 문을 열고 정령을 부른다. 이 이미지는 마치 무언가에 홀리듯 창문으로 다가가는 아나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아나 스스로가 유령이 되어버렸음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숨을 마저 거두어 가달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혹은 이미 자신은 정령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한 것처럼. 정령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아나와 정령 간의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뜻이고 이는 타자와 아나의 시선이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나를 치료한 의사는 아나의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찌 되었든 아나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글쎄, 과연 아나가 살아있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아니, 아나가 살아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무수한 의문부호의 끝에 나는 아나가 죽어있는 상태이며 죽음으로서 한층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순수한 어린아이가 바라보기에는 너무 큰 시야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여담으로 덧붙이고자 했으나 여담으로 붙이기에는 애매한 몇몇 이미지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자면, 영화를 보는 동안 몇몇 이미지들이 촉감을 통해 미묘한 정서를 자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의 아빠가 독버섯을 발로 짓밟는 장면, 이사벨이 손가락의 피를 입술에 묻히는 장면, 낯선 남자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포개어 보는 아나의 장면, 아나가 독버섯을 향해 손을 뻗는 장면이 있는데 최근 이러한 클로즈업의 이미지를 흥미롭게 살피다 보니 아무래도 영화 속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아나의 아빠는 아나와 이사벨을 데리고 버섯을 채집하며 아이들에게 버섯과 독버섯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독버섯을 통해서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에 대해 아나는 독버섯의 향기가 좋다고 이야기한다. 아빠는 아나에게 어릴 때는 그런 것들 때문에 속아 넘어간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독버섯을 발로 짓밟아 버린다. 독버섯을 밟는 발과 짓눌린 독버섯의 이미지가 클로즈업으로 등장하고 이를 바라보는 아나의 시선이 등장한다.
또한 이 장면에서 아빠는 아나와 이사벨에게 저 멀리 버섯들이 많은 버섯 정원이 있지만 너희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곳에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다음에 엄마 몰래 함께 가자고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기약 없는 약속일뿐이다.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억압감이다. 아빠가 아나와 이사벨을 대하는 태도(가령 할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기에 독버섯을 먹은 적이 없다는 이야기 등.)와 그것을 일치시키는 발의 중압감이 느껴지는 이미지에서 세대를 거듭하여 자행되는 억압감의 정서가 불러일으켜진다.
이사벨이 피를 묻히는 장면은 불안함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언뜻 화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서 거울 속 입의 조각난 이미지는 이사벨에게 무언가 불길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또한 지금껏 보지 못 한 새빨간 아이의 입술은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감지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시 샛길로 빠져나가 생각해보자면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이기 때문에 가령 공포영화인 <프랑켄슈타인>이나 학교 수업시간에 만나는 돈 호세 아저씨, 침대를 넘나들며 베개싸움을 하는 아이들, 고양이의 목을 조르는 이사벨, 불길 위를 뛰어넘는 아이들의 모습 등 아이들이 접하는 공포스러운 것이나 장난 또한 아무렇지 않게 그려지고는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사실 행위의 주체가 아이라는 점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불안을 일으킨다. 편협한 사고일지도 모르겠지만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에서 불안함을 깊게 느끼게 된다.
아나가 낯선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아닐 수도 있는)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을 포개어보는 모습과 그런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는 시선의 이미지에서는 아나의 기대감과 함께 괴물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나가 타자의 편에 편입되어 간다는 점에서 어쩌면 아나라는 존재가 사회적으로 지워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아나가 낯선 남자에게 쉽게 다가가 그를 보살피는 모습에서 사랑스러움과 함께 불안함을 함께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나가 독버섯을 향해 손을 뻗는 장면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불안한 장면이다. 자신이 찾아 헤매던 것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의 손에 들어간 ‘독’ 일 수도 있는 무언가에 손을 뻗는 것. 우리가 영화를 보며 줄곧 쫓아오던 아이의 죽음과도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촉감의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감독은 성공적으로 직접적인 공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감정적으로 불안한 공포감을 떠안게 만든다.
보통 영화에 대해 글을 쓸 때 마치는 글에 대한 부분을 별도로 명시하지 않는 편이지만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아주 짧은 추천사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며 적어본다.
기본적으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이 불안감을 조성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 중 이미지를 통해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고 그 감정과 영화 속 이야기의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의 차가움을 좋아한다. <벌집의 정령>은 이런 면에서 한 없이 차가운 영화이다. 다만, 그러면서도 따뜻한 색감과 아이의 시선을 다루는 압도적인 카메라로 이런 차가운 면을 숨겨버린다.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지점이 순간순간 스크린을 뚫고 나올 때마다 숨을 죽이게 된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어떤 정서의 극단에 서있는 느낌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 느낌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영화가 조성되기 위한 사회적인 배경이나 사건들에 집중한다면 영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니 영화를 본 뒤 영화가 품고 있는 사회적 메시지에 대해서도 알아보시는 것을 권한다.
PS. 이 외에도 아름다운 샷 디자인과 미쟝센, 카메라의 위치 등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일단은 여기서 글을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