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다
20년 지기 relationship에 내가 끼어들었다. 이야기하는 걸 보니 둘이 아주 막역한 사이다. 주얼리 회사 대표 말로는 팀장이 자기 인생을 끌어올려준 사람이라고 한다. 지난주 부산 회의에 갔을 때도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팀장이 챙겨주고 끌어주는 사람이 또 있었다. 알면 알수록 팀장은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세심한 존중과 배려를 해준다.
회의를 하면서, 이동하면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대표는 큰 회사에 있다가 나와서 창업한 지 3년여 정도 되었고 자기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직원들은 있지만 사람 다루는 어려움도 토로하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큰 회사에 있을 때와는 달리 전부 자기가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 힘든 상황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고 나는 거기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해주었다.
오랜만에 입 안에 스며들어 천천히 음미한 와인은 저가임에도 풍미가 훌륭했다. 하지만 대표는 딱 한잔만 받고 술에 취하는 걸 즐기지는 않는 모습이었고 나는 그 점을 좋게 봤다. 성장에 목마른 사람은 술 취해서 득이 될 게 없으니까 몸도 절여지고. 초롱초롱한 정신과 반짝이는 판단력을 고순도로 유지해도 냉혹한 비즈니스 정글에서 살아남을까 말까다. 일과 회사생각으로 주말도 없고 늘 수면부족이라고 한다. 신규 채용한 고급 인력 인건비 확보를 위해서 기보에서 대출도 받고 여러 과제도 수주하고 있다. 우리를 컨택한 것도 과제 추진의 일환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곧 집에 갈 수 있겠지라는 뻔한 예상과는 다르게 골프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더니 급기야는 바로 스크린 골프를 치러 가자고 한다. 뭐야, 골프는 50억 금융자산 이루기까지는 안칠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갑자기 스크린 치러 가게 될 줄이야. 그것도 처음 보는 여자와.. 인생은 예측 불가한 깜짝 우연의 연속이다.
팀장은 내가 골프를 잘 '쳤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도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주얼리 CEO는 골프에 재미 붙인 지 얼마 안 되었고 3월 말에 첫 비즈니스 라운딩을 해야 돼서 골프에 관심이 많고 잘 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팀장은 내가 호주 대학 총장과도 골프 친 사람이라고 대표에게 소개했다. 나랑 같이 해외출장 간 것도 아니면서 별 걸 다 아네. 나를 어떻게 다뤄야 되는지 깊이 생각하고 있음을 대화 중에 알 수 있었다. 3개월 동안 일 하나도 안 줘서 아주 편했을 거라고 한다.
저녁 식사 후 호프집으로 향하곤 했던 다른 회식들과는 달리 스크린 골프를 같이 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근처에 골프존 등의 스크린 골프장이 있나 서로 폰으로 검색부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 골프존 조이마루가 있어서 그리로 향하다가 그곳은 회원제라서 비회원은 못 친다는 것이 떠올라서 다른 곳을 알아봤다. 부슬비가 내리는 길을 헤매다가 마침 한 곳이 눈에 띄어서 들어갔다.
상의 반팔 골프웨어도 빌려주고 골프화와 장갑도 준비되어 있었다. 골프채 세트도 또한. 가격을 보니 예전보다 오히려 싼 느낌이었다. 스크린 골프 유행이 지나서 그런 것 같았다.
오랜만에 준비도 못하고 휘둘러본 빈 스윙의 느낌, 낯설다.. 몸도 뻣뻣해서 예전처럼 잘 돌아가지도 않고. 거리는 많이 안 나갔지만 페어웨이는 지켰고 홀이 계속될수록 비거리도 나오고 영점이 샤프하게 조절되기 시작했다. 반면에 팀장은 구력은 오래되었지만 스윙은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 할지 도무지 진단을 할 수 없는 근본 없는 엉망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자기 딴에는 좀 배웠다고 대표를 가르치려 드는 데 옆에서 뭐라 말은 못 하겠고 묵묵히 입 다물고 있다가 내 차례가 되면 치고 다른 사람들이 페어웨이로 공을 '띄우면' 그때마다 '굿샷!' 추임새를 넣어주곤 했다.
대표는 팀장이 지적질하는 게 납득이 안 갈 때마다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뭐라도 한 마디 해달라는 눈빛이었지만 나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팀장이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데, 내가 거기에 개입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 정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기에 가만히 있었다. 팀장의 레슨은 갈수록 산으로 가고 있었고 대표의 샷은 갈수록 엉망이 되어 공은 몇십 미터도 못 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보다 못한 내가 드디어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었다. 아무 말 없이 다가가서 대표의 고운 손등에 내 손가락 하나를 부드럽게 올려놓고 나의 다른 손은 클럽을 잡고는 임팩트 전후 하프 스윙에서 손목의 움직임을 만들어주었다.
내 코칭을 숨죽이며 뒤에서 보고 있는 팀장. 자기가 잘 치면 모를까 본인도 엉망이면서 내 앞에서 남을 가르치는 게 좀 아니라고 생각되었는지 아니면 체력이 달려서 지쳤는지 훈수질이 점차 줄어들었다.
나는 갈수록 잘 맞았고 징검다리 버디도 나왔다. 하지만 나는 잘 맞건 버디를 잡건 또는 그린 스피드에 적응을 못해서 포펏을 하건, 돌부처 이창호 마냥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시종 무감정 노액션 모드였고, 반면에 팀장은 어쩌다 스위트스폿에 맞으면 기분 좋다고 환호하고, 오비가 나면 큰 탄식과 함께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샷 하나하나에 격하게 감정 표현을 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치다가 어느 순간 대표가 나를 보며 말하였다.
"다음부터 로체님 따라다닐래요."
따라다닌다고..? 그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비즈니스인 관계를 넘어서는 작은 친밀감이 느껴지는 표현이다.
11시 01분에 서울로 출발하는 마지막 고속버스 시간을 15분 남겨두고 나와서 차로 이동하는 5분 남짓 시간 동안 다음에 또 언제 만날 지를 이야기하는데 "한 달에 한 번은 봐야죠."라고 대표가 말한다. 허걱! 그럼 매달 스크린 쳐야 되는 거야?... 바쁜 일정 속에서 회사를 키우려는 스타트업 대표가 그렇게 자주 시간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골프 실력으로 보자면 나랑 어울릴 수준이 전혀 안 되는 사람들인데 업무적인 관계이다 보니 안칠 수도 없다. 그냥 너그럽게 베풀어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듯하다. 사사건건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도 피곤한 일이고 내가 뭐라도 줄 수 있는 게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좋은 거다. 팀장과의 관계도 업무를 넘어서는 특별함이 있을 것이고, 열정 가득하고 미래 지향적인 대표와도 친해지면 좋다.
한편 오전에 예당 아카데미에서 전화가 왔다. 이미 접수가 마감된 강좌인데 (뒤늦게 추가신청 문의한) 나를 위해서 한 자리 만들었고 11시에 강좌신청 창이 열릴 테니 신청하시면 접수하고 바로 닫겠다고 한다. 내심 포기하고 있었는데 기쁜 마음으로 신청 및 결재 완료하였다. 분명 선순위 대기자들이 여럿 있을 텐데 작년에 친해진 직원분 덕분이 아닐까 싶다.
기분 좋은 금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