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보고계신 거 맞나요?
주제 사라마구<눈먼자들의 도시>를 읽고
2021년 8월 1일부터 8월 17일까지 하루를 여는 새벽에 하루 한 챕터씩 읽은 책이 있었다. 하반기의 시작과 함께 연초의 계획들을 점검해보고 좀 더 발전적인 계획을 세우던 중에 친구와 함께 시작해 보기로 한 독서였다. 새벽의 영역에 속해있는 5시는 혼자서 무언가를 계획했다가는 쉽사리 작심삼일의 구렁텅이로 빠져서 썩 괜찮은 계획들도 신기루로 만들 것이 뻔하니 현명하게 ’같이’의 가치를 활용해보기로 했다. 하루에 읽는 분량이 대개는 20페이지 남짓이라 부담스럽지 않았고 많은 시간 들이지 않고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고 싶은 독서법이다. 첫 경험에 간택된 책이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에 기여한 바가 크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실명’과 ‘전염병’이 결합된 끔찍한 소설이었다. 지옥을 엿보았다고 해야겠다. 전쟁과 재난이 아니어도 우리가 누리는 문명이라는 것이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음을 보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그들이 정말 많은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읽기 전에 한 번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하고 싶다. 어떤 비극을 상상하더라도 그 이상의 처참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매일 악취와 더러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테지만, 단지 눈이 보인다는 이유 하나가 나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고 있는지를 새삼스레 깨닫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는 인간의 본성만 남고 껍데기는 모두 사라진다. 우리는 ’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야 하므로 ’ 보는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내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두 눈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선 많은 것이 달라진다. 모두 눈이 먼 그들에겐 먹고사는 것만이 중요해졌다.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다면 인간으로서의 존엄 따위 던져버릴 수도 있다. 음식을 찾을 수 있다면 네 발로 길 수도 있고 아내를 다른 남자의 성욕 해소의 재물로 보낼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돼지우리와 다를 바 없는 수용소에서의 삶일지라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신경 쓰는 것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라는 말만이 울림을 가진다.
“누가 보기 좋은 것에 관심을 가지겠소.”
“어쩌면 눈먼 사람들의 세상에서만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는 그들의 대화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예정된 ‘죽음 앞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직은 먼 일인 것 같지만 한순간에 어떤 사건이 생길지, 그 사건이 우리를 어떤 생지옥으로 몰아갈지를 짐작할 수 없다. 소설의 시작에서 어느 날 퇴근길 차 안에서 갑자기 한 남자에게 실명이 찾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결국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죽음은 전염되지 않지만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우리의 생을 허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명의 경험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아가씨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나이 든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았으므로 그녀는 그 노인을 사랑했고 눈을 뜬 후에도 사랑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라고 말하는 유일한 눈 뜬 자의 말은, 두 눈을 멀쩡히 뜨고서 진실을 보지 못한 어리석음에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찔렀던 어느 왕을 연상시킨다. (그 왕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고 딸들에게 아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증명해보라고 했다지 아마.) 눈은 분별이다. 눈 뜬 눈먼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내 삶에 놓여 있는 진실만큼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겠다. 죽음이 내 생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영원히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그날’에 내 두 눈을 찌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도록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