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주문 합니다. 그리고...
<채링크로스 84번>를 읽고
<채링크로스 84번지>는 헬렌과 프랭크가 주고받은 편지로 만든 책이다. 그런데 나는 헬렌도 프랭크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고 하면 고흐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하니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까지도 책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쉽게 납득하는데 도대체 헬렌과 프랭크가 누구이기에 그들의 편지가 책이 되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단 말인가. 그럼 내가 그토록 숱하게 써온 편지들도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일까?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영국 런던의 고서적을 사고파는 마크스&코 서점의 주소다. 헬렌 한프는 자신이 있는 뉴욕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거나 너무 가격이 비싸 부담스러운 책들을 이곳에서 구하고자 마크스 서점으로 책 주문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마크스 서점의 직원 프랭크 도엘이 이 편지에 회신을 보내며 이들의 인연이 시작된다.
나는 책을 주문하는 편지에 ‘책을 주문합니다.’라고 쓰고 주문하는 책 목록을 쭉 쓰는 것으로 편지를 마무리했을 것 같은데 헬렌은 다르다. 책 제목도 그냥 말하는 법이 없이 재기 발랄한 수식들을 덧붙인다. 주문한 책이 좀 늦는다 싶으면 ‘프랭크 씨 요즘 일 안 하시느냐’고 다그치고 ‘요즘에 일이 없어 돈이 궁하니 당분간 책을 주문하지 않겠다’고 알리기도 한다. 식량 배급제를 시행하는 영국의 상황을 듣고 ‘건 달걀을 보낼까요? 날달걀을 보내는 게 좋을까요?’ 묻고 고기와 소시지 같은 먹거리들을 보낸다. 그녀의 선물을 받은 서점의 직원들은 그녀에게 감사를 담은 편지를 보내고 그들의 가족들도 편지를 하면서 헬렌과 마크스 서점 사람들은 친구가 된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작은 추억 하나 공유하는 것이 없는 사이에도 우정이 가능한가?
나는 관계의 확장에 무능하다. 헬렌이 그들에게 책을 주문하고 받는데 필요한 공적인 요청 바깥의 문장을 나는 편지에 쓰지 못한다. 프랭크의 아내와 아이들의 안부까지 묻는 다정함이 내겐 없다. 타인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하고 염려하지만 거기까지만이지 직접 달걀을 사서 보내는 행동력도 내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면식이 없는 타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 선을 긋는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내 편지들은 책이 될 수 없지만 헬렌의 편지는 책이 되어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인가 보다. 평범한 그들이 나눈 편지들에는 위대한 누군가가 쓴 편지와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책들이 궁금해지고 그녀의 재치 있는 입담이 부러워지고 끝내 채링크로스로 가보고 싶게 만드는 발랄한 힘이 있었다.
헬렌과 프랭크의 편지는 1945년부터 1968년까지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책 주문과 함께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 아이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 옆집 할머니가 이사 가셔서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나눈다는 것은 분명 두 사람이 서로를 친구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아, 바뀌었다. 친구라고 믿어서 작은 이야기들까지 나눈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이야기들을 오랜 시간 동안 전하면서 친구가 된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의 글과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좋은 글 참 잘 읽었어요'라고 댓글을 남기거나, '구독'을 누르기에 주저하는 나에게 작은 메시지를 주는 책이었다. 더불어 책이 얇아서 적은 시간으로 책 한 권 읽었다는 성취감은 덤으로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