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너무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어. 원래는 책이 원작인데 드라마로 제작된 거래. 보면서 너 생각도 나더라. 너도 한번 봤으면 좋겠어.“
<나의 눈부신 친구>라는 제목이 예쁜 드라마를 친구가 알려주었다. 왓챠라는 앱을 다운받고 가입을 하는데... 하다가... 그 절차를 완료하지 못하고 앱을 지워버렸다. 복잡한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려면 애정이 커야 한다.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겐 ‘책이 원작인데..’라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기에 그 복잡한 절차에 대한 스스로의 귀찮음을 존중하기로 했다.
‘나폴리 4부작’이라고 불리는 엘레나 페란테의 4권의 소설이었다. 나폴리에서 태어난 두 여자 릴라와 레누의 이야기다. 열 살부터 시작해서 노년기까지, 시대로 보면 1940년대부터 시작해서 2000년대에 이르는 2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서사로 펼쳐져있다. 역동적인 시대와 함께 하는 그녀들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때때로 내 삶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기도 하고 내 인생의 짧지 않은 시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아마도 소설이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고 또 여성의 서사라 감정 이입이 잘 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레누의 시점에서 진행되는데 어쩜 이렇게 여자의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감탄하며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릴라와 레누는 둘 다 똑똑한 아이들이다. 둘 중에서도 릴라는 특별히 비범하고 다방면으로 직관이나 감각이 발달한 아주 영리한 아이다. 시대와 지역과 여성이라는 한계에 구속받지 않았고, 책을 읽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야심 차게 이야기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다. 레누는 그걸 빨리 알아보았다. 그래서 릴라를 동경하면서도 질투하고,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이 더 잘되기를 바라고, 가장 좋아하면서도 제일 미워한다. 무엇이 됐든 릴라와 함께 할 때 의미와 가치가 생기고 아무리 괜찮은 성과를 거두어도 릴라의 인정이 없다면 그 성과는 순식간에 그저 그런 것으로 헤식어 버리고 만다. 레누의 인생에 릴라가 아주 깊숙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 두 아이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은 학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두 아이는 집안 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운 상황이다. 우여곡절 끝에 레누는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고 릴라는 끝내 학교가 아닌 아버지의 구둣방으로 출근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 두 아이의 삶은 서로 다른 갈림길 앞에 놓이게 되고 학교를 다니는 레누와 구둣방을 다니는 릴라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 레누와는 달리 성장하고 나이 들어가는 내내 릴라의 인생은 한순간도 평안하지 못하다. 그것이 릴라의 지랄 맞은 성격 탓인지, 릴라가 처한 환경에선 과분한 직관과 통찰의 능력을 가졌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만약 릴라가 학교에 갔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에 미련이 남았다. 어쩌면 뾰족한 성질 때문에 선생님들과 불화를 겪다가 끝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폴리 변두리 동네를 벗어나서 더 큰 세계를 경험하고 더 많이 교류하며 공부를 했다면 조금 더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지도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위태롭게 폭발과 비탄을 넘나드는 릴라가 안쓰러웠다.
두 인물의 인생을 따라가면서 유치하게도 마음 한편으로 조금 더 편들어주게 되는 쪽이 생긴다. 이미 ‘안쓰러웠다‘라는 단어로 애정을 드러냈듯이 릴라 쪽에 더 마음이 많이 갔다. 아픈 손가락 같은 인물이기도 했고 그녀가 감당하는 불행들이 너무 가혹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마음이 간 것은 무엇보다 그녀의 솔직함과 투지 때문이다. 비록 불행한 삶을 살았을지언정 언제나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솔직하게 살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나 하나 참으면 소란스럽지 않으니까 참자’, ‘내가 원하는 걸 다 할 순 없는 거야.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지’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꼬인 성격이기도 하고 자기중심적이기도 하고 때로 지나치게 무례하기도 하지만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참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거침없이 일을 저지르고, 망설임 없이 직진하는 성향이 속 시원해서 마음에 들더라. (하지만 확신하건대 릴라가 나의 친구였다면 레누처럼 릴라를 오래 참아주지는 못했을 것 같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을 몇 편 봤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책을 먼저 읽고 영상을 접한 경우에는 책에서 얻은 즐거움만큼은 느끼지 못하고 실망했던 경험들이 많다. 당연한 것이 책의 방대한 서사를 담기에는 영상이 갖는 제약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이해는 이해고 취향은 취향인 만큼 2차 생산물로서의 영상들을 잘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폴리 4부작은 왓챠 가입의 성가심을 기꺼이 감수하며 드라마를 보고 싶은 생각이다. 여름 내내 읽고, 끝내 다 읽은 성취감에 젖어서 책과 영상을 비교해보고 싶기도 하고 드라마를 너무 재미있게 봤다는 친구의 취향을 엿보고 싶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