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으로 하루 마무리
클래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낯설어하지도 않는다.
예전에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셨기에 어릴 적부터 클래식을 많이 들어서인지, 제목이나 작곡가를 알지는 못해도 클래식을 듣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나 어렵다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았다. 클래식을 찾아 듣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클래식 대신 피아노 연주곡을 좋아하는 편이다. 클래식은 너무 길고, 어쩔 때는 지루하고, 쓸데없이 웅장했으며, 어쩌면 너무나 익숙하다고(자동차 후진음이나 지하철 환승 음악, 세탁기 종료음 등) 생각했다.
남의집에서 클래식을 새롭게 만나기 전까지는.
이번엔 어디로 여행을 떠날까, 하며 남의집 창을 돌아다니다 눈에 띄었다. 클래식 음악으로 하루 마무리
클래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라... 어느 하루가 생각났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가슴이 뻥 떠져버릴 것 같았던 날. 술도 사람도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아서 머리가 아파올 때 순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생각났다. 가끔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 월광 소나타를 귀에 가득 차게 들으면 몸이 가라앉는 듯 편해졌었다. 그래서 그날도 그 무엇도 아닌 귀 안 가득하게 울려 퍼지는 월광 소나타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었다.
나에게 가끔 사용하는 스트레스 해소제였던 월광 소나타를 생각하며 혹시나 새로운 해소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신청하게 되었다.
이번 남의집은 성수동의 골목에 위치해있었다. 클래식 기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신 호스트님이 전공 후 연주자나 선생님 이외의 다양한 직업적 카테고리를 찾기 어려워 클래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만든 클래식 음악을 전파하는 일을 하는 스튜디오였다.
클래식에 어울리는 소품들과 분위기, 그리고 준비해주신 와인과 다과까지. 다른 게스트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사실 나 말고 클래식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게스트로 오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나와 같이 클래식에 대해 알고는 싶지만 잘 알지 못하는 분이 오셔서 함께 클래식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다. (끝나고 난 뒤 드는 생각은 클래식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오셨다 하더라도 위축되거나 하지 않고 다양한 감상평을 나누면서 오히려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 같다. :)
본격적인 감상 전, 한 주간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도록 호스트님께서는 아로마 향을 피워주셨다. 마음이 편해지는 아로마 향과 와인 한 모금. 이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오늘의 주제는 '사랑이 담긴 음악'이었고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 (첫사랑의 그리움), 리스트의 사랑의 꿈 (사랑의 고백), 슈만 판타지 Op.54, 1악장 (헤어지는 슬픔), 브람스 6개의 소품 2번 인터메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진행되었다.
작곡가에 대한 간단한 생애, 곡 속에 들어있는 뒷이야기. 특히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들은 후 방 안 가득 차게 곡을 감상하였다.
이전에 들어보았던 곡도 있었고 처음 들었던 곡도 있었으며 어디선가 많이 들어 익숙했던 곡들도 있었다.
조금 간단히 나의 감상평을 적어보자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 (첫사랑의 그리움)은 이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곡이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느낌의 곡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쇼팽의 아련한 첫사랑과 그 첫사랑이 마냥 슬프기보다는 행복했고 아름다웠던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따뜻해지고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리스트의 사랑의 꿈 (사랑의 고백)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노래였는데, 이렇게 끝까지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저 아름다운 선율의 화려한 기교가 느껴지는 곡이라 생각했었는데 뒷 이야기를 알고 들으니 리스트와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의 사랑이 느껴져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슈만 판타지 Op.54, 1악장 (헤어지는 슬픔)은 설명을 들어야 이해가 되는 곡이었다. 슈만이 클라라와의 사랑을 위해 법정 싸움까지 가는 슬픔과 승소의 기쁨이 느껴지는 곡이었는데, 사실 설명을 듣지 않고 곡을 들었다면 '헤어지는' 느낌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만큼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상황이지만, 오히려 나는 절대 너를 포기할 수 없다!라는 느낌이 느껴졌달까?
마지막 브람스 6개의 소품 2번 인터메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이번 플레이리스트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곡이다. 일단 곡 설명 전에 브람스는 슈만의 제자였고 스승의 아내였던 슈만 클라라를 남몰래 사랑해왔다. 슈만의 죽음 후에도 클라라의 주변을 맴돌며 보호했던 브람스. 드라마나 소설에 등장할 법한 설정이지만, 음악사에서는 로베르트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 그리고 그의 제자 브람스의 강렬했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다. 정신병자가 된 스승 슈만과 그만을 사랑했던 클라라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평생 독신으로 산 브람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고스란히 곡 속에 녹아있었는데, 호스트님께서 그 부분을 직접 연주해주셔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이렇게 설명을 듣고 곡을 감상하니 너무 재미있고 좋았다.
꼭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듣는 기분이었달까?
미술관에 가면 혼자 작품을 감상한 뒤, 도슨트를 다시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고는 했다. 내가 이해한 느낌과 그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이 같을 때도 다를 때도 있었는데 그 부분이 참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그러고 나면 꼭 두 가지의 작품을 본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미술 작품은 미술관에 가서 도슨트를 듣고 그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데, 클래식은 이러한 부분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이렇게 클래식도 그 뒷이야기를 알고 들으면 더 재미있고 이해하기도 쉬울 텐데 말이다.
오늘 나는 남의집을 통해 클래식에 대해 한 발짝 정도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어디선가 클래식이 흘러나오면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어떤 작곡가의 곡인지, 그 뒷 이야기는 무엇인지 궁금해질 것 같고 오늘 함께했던 곡들은 그 분위기에 맞춰 생각이 날 때 찾아들을 것 같다.
아마 이런 생각이 들게 한 것은 오늘 들은 클래식도 한몫했지만 그와 함께한 와인 한 잔과 귀를 감싸주는 좋은 음향, 평온해지는 아로마 향 그리고 좋은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넘치게 포근하고 힐링하는 시간이었던,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가 언젠가 다시 이곳에서 방문해 한두 시간 정도 클래식을 들으며 나를 풀고 가고 싶은 남의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