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하나의 거리

3부. 높을수록 얇은 공기

by 로그캐빈
카카오톡 창의 '1'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늦은 봄, 손바닥에 땀이 밸 정도로 긴장한 채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글자를 썼다 지우기를 수십 번 반복하다가, 결국 전송 버튼을 눌렀다.

"공연을 하나 보러 가고 싶은데, 혹시 시간 되면 같이 갈래요?"

손가락이 화면을 떠난 뒤에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실감이 났다.


메신저 창은 잠잠했고,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가 결국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심장은 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지금 이 한 줄이 앞으로의 분위기를 다 망치면 어떡하지.


담당하던 게임이 잘되면서 나는 조금 들떠 있었고 우리 팀은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어울렸다.

그 시끌벅적한 무리 속에서 내 시선은 자꾸 한 곳으로만 향했다.

그녀는 그 무렵 소개팅 이야기에 자주 올랐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지난주 그 자리는 어땠느냐는 말까지 꼭 내 귀에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웃어넘기는 척했지만 속이 조용히 쓰렸다.


어렵게 자리 잡은 직장이었다.

고백이 어긋나기라도 하면 다음 날부터 같은 사무실에서 눈길 둘 곳부터 계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데이트 한 번 못 해보고 이 짝사랑을 접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한참 뒤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머, 저 연극 정말 좋아해요! 같이 가요!"

그 짧은 답장 한 줄에, 의자에 기대 있던 등이 저절로 펴졌다.


공연장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시간, 늦봄의 바람이 따뜻해진 볼을 스쳤다.

손가락 끝이 자꾸 휴대폰 모서리를 문질렀고, 화면을 켰다 껐다 했다.

멀리서 그녀가 보였다.

사무실에서 데이터 수집 여부를 묻던 그 신입 사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햇살 아래 서 있는 모습이 낯설게 환했다.


연극의 내용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대 위 배우들의 대사보다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숨소리와 미세한 움직임에 내 온 신경이 그쪽으로 몰려 있었으니까.

객석이 어두워질수록, 나는 오히려 더 깨어났다.


공연이 끝나고 잔디밭을 걸었다.

밤공기는 시원했고, 우리는 아직 서로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공연 이야기를 꺼낼 때 웃는 방식이, 사무실에서 보던 것과 달랐다.

나는 그 다름을 눈에 담으면서도, 괜찮은 척 앞을 보며 걸었다.

너무 빨리 감정을 내비쳤다가 이 저녁이 마지막이 될까 봐, 괜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퇴근 후 우리는 자주 만났다.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좋았다.


정식으로 만나기 전, 우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애매한 사이였다.

주말에 회사 근처에서 만나 걷다가 멀리 동료들 얼굴이 보이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괜히 걸음을 늦추거나 몸을 숨겼다.

집과 회사가 가까웠던 탓에, 집 근처 카페에 앉아 있다가 아는 동료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사람이 커피를 받아 나갈 때까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없다고 알고 있었으니, 소개팅 주선이 물밀듯 들어왔다.

나보다 훨씬 조건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나는 애써 웃어넘기면서도 속으로는 점점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넘기 힘든 벽이 하나 있었다.

"가까운 데서 시작하는 연애는 안 믿어요."

예전에 동아리 사람을 만났다가, 한동안 사람들 눈을 피해 다닌 적이 있다고 그녀는 낮게 말했다.

"헤어지고 나면 매일 얼굴 봐야 하잖아요."

그 말 앞에서 나는 더 다그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나는 물러설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내가 정식으로 만나자고 할 때마다, 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끝내 미안하다고 말했다.

약속이 있는 날이면 그녀는 늘 정성껏 꾸민 얼굴로 나타났고,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느 날 내가 "눈에 뭐가 묻었다" 하고 손을 뻗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작은 순간들이 미안하다는 말보다 깊이 새겨졌다.


비 오는 여름밤.

우리는 청계천을 걷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잠시 다리 밑으로 몸을 숨겼다.

도심의 비는 흙냄새가 아니라 아스팔트 냄새가 났다.

빗소리는 주변의 소음을 모두 지워버리고, 오직 우리 둘의 숨소리만 남겼다.

나는 다시 한번 내 진심을 꺼내 놓았다.

이번에는 거절의 이유도, 원칙에 대한 설명도 아닌, 그녀의 진짜 마음을 듣고 싶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우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말은 없었다.

그녀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다리 밑의 공기는 축축했고, 청계천 물소리가 우리 사이를 천천히 메웠다.

입술이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준비해 둔 모든 문장이 한꺼번에 증발했다.


다음 날 출근길,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람들은 어제와 같은 얼굴로 인사를 나눴고, 나는 어제와 같은 의자로 걸어갔다.

메신저 창에는 우리 둘만 아는 문장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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