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을수록 얇은 공기

3부. 높을수록 얇은 공기

by 로그캐빈
"팀장님, 그건 제 업무 범위가 아닌 것 같은데요."


말이 끝나자 회의실 안이 잠깐 비었다.

방금 전까지 화이트보드에 선을 긋던 내 동작도 그대로 멈췄다.

누군가 종이컵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두드리는 소리만 작게 났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종이컵 가장자리만 두드리고 있었다.

내 뒤 화이트보드에는 해야 할 일과 순서가 빼곡했지만, 그 한마디가 나오자 나는 들고 있던 마커부터 내려놓았다.

그 선 앞에서 나는 잠깐 예전으로 돌아갔다.



리더급 인력들은 하나둘 신규 프로젝트로 빠져나갔고, 내가 처음 맡았던 게임의 정식 후속작도 그 한가운데 있었다.

여자친구는 박 선배 제안으로 먼저 그쪽으로 옮겨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래 동경해 온 그 박 선배가 내게도 직접 오라고 했다.


나도 당연히 따라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조직은 내 이름을 놓지 않았다.

웹과 DB를 함께 맡을 자리를 끝내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면접은 몇 번이나 돌았지만 적임자는 마지막 문턱에서 번번이 어긋났고, 내 이동 신청서는 더 올라가지 못한 채 접혔다.

대신 팀장님은 회의실 한쪽 끝에서 서류 한 장을 밀어 놓았다.

"이동은 지금 못 시켜주겠다. 대신 역할과 책임을 공식적으로 정리해 줄게. 이제부터는 네가 책임져."

종이 위 직함을 내려다보는데 이름보다 그 글자가 먼저 낯설었다.

그렇게 나는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에 파트장이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 직함까지 달았다.

명함이 먼저 앞서 나간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실무자로 함께 구르며 친구처럼 지내던 동년배 팀원들은, 발령 직후부터 나를 대하는 결이 조금씩 달라졌다.

첫 회의에서 내가 의견을 내자, 다들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시선만 아래로 떨군 채 침묵을 길게 끌었다.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낼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 팀원들이 커피를 뽑으러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예전처럼 "같이 가시죠"라는 말은 내 책상 앞까지 오지 않았다.

직함은 위로 올라갔지만, 가까웠던 자리는 그만큼 먼저 비어갔다.


신규 이벤트 회의가 열리던 날이면 늘 비슷한 순서가 반복됐다.

기획과 아트가 먼저 앞자리를 채우고, 화면에는 일정표와 시안이 올라갔다.

다음 주 업데이트, 배너 문구, 쿠폰 노출 위치가 빠르게 지나가도 우리 팀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다.

나는 노트북을 닫지 못한 채 회의실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말했다.

"그런데 어제부터 리텐션이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 한마디가 나오면 시선이 한 번에 우리 쪽으로 꺾였다.

조금 전까지 잘 넘어가던 표가 멈추고, 벽면 시계 초침 소리만 또렷해졌다.

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은 먼저 나갔고, 지워지지 않은 마커 자국과 반쯤 식은 종이컵만 테이블 위에 남았다.

나는 빈 회의실에 혼자 서서 화이트보드 아래에 적힌 우리 팀 이름을 한 번 올려다봤다.

우리 팀은 늘 마지막에 불렸고, 문제 앞에서만 앞으로 나갔다.


그래서 판을 바꿔 보기로 했다.

반복되던 데이터 추출 요청과 수작업 분석을 자동화하고, 실시간 분석 환경을 붙여서 우리 팀이 먼저 수치를 읽고 방향까지 말하는 쪽으로 가 보자는 계획서를 썼다.

어디가 막히는지, 무엇에 투자해야 하는지,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지, 결과가 나오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한 장 한 장 적어 내려갔다.

종이 끝에 도달하고도 한동안 펜을 놓지 못했다.


디렉터님 앞에 앉았을 때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몇 장을 넘긴 뒤에도 별말이 없자, 내가 먼저 책상 모서리를 짚고 입을 열었다.

"우리 팀에 투자하지 않으실 거라면, 저도 팀장직을 내려놓겠습니다. 받쳐주기만 하는 팀으로 남을 거라면,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디렉터님은 종이를 덮고 잠깐 나를 봤다.

"그래. 한 번만 해봐. 대신 결과로 보여줘."

며칠 지나 시니어 개발자 두 명이 우리 팀으로 왔다.

사람을 받는 순간 끝나는 줄 알았는데, 진짜 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두 분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성향은 놀랄 만큼 달랐다.

한 분은 늘 선을 그었다.

회의실에서 역할을 나누다 조금만 경계가 흐려지면, 그 문장이 다시 돌아왔다.

"팀장님, 그건 제 업무 범위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말을 직접 듣고 있으면 반박보다도 계산이 먼저 섰다.

여기서 세게 밀어붙이면 사람부터 금이 갈 것 같고, 웃어넘기면 일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나는 대꾸 대신 마커 뚜껑을 몇 번 열었다 닫았고, 회의가 끝난 뒤에도 화이트보드 한쪽에 그분 이름 옆 할 일은 자주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워지지 않은 항목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다음 줄 할 일을 적었다.


결국 말보다 화면을 먼저 내밀기로 했다.

이틀 동안 붙들고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회의 전날 밤, 분석 결과를 캡처해 팀장들에게 먼저 돌렸다. 숫자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 움직임이 어떤 의사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한 장씩 정리해서 붙였다.

다음 날 회의실 스크린에 그 화면을 띄웠을 때, 적어도 더는 왜 해야 하느냐부터 설명하지는 않아도 됐다.


다른 한 분은 정반대였다.

킥오프 날 아침,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분은 이미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에 검은 마커 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고, 보드에는 밤새 정리한 로그 패턴 분류 기준이 빼곡했다.

정상, 지연, 반복, 이상. 항목 옆 작은 글씨로는 예외 케이스가 촘촘히 달려 있었다.

그분은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보드 한가운데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서 한 번 더 갈라집니다. 이건 평소 노이즈 같아 보여도 묶어 보면 다르게 보여요."

잠시 뒤 그분은 노트북 화면을 돌려 로그 묶음을 보여줬다.

숫자는 아직 거칠었지만, 어디가 평소와 다른지 손가락 끝이 먼저 길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서서 손에 묻은 마커 가루를 엄지로 문지르며 그 장면을 한참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델은 룰 베이스 탐지가 놓치던 이상 패턴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리포트 화면 오른쪽 위 그래프가 조금씩 올라갈 때마다, 나는 회의실 안의 공기도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꼈다. 그분은 훗날 내가 속한 AI 연구 조직의 수장이 됐다.


어느 날부터 회의실 풍경도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들어가기 전 전날 지표를 한 장짜리로 뽑아 형광펜으로 꺾인 지점을 표시해 갔다.

유입 그래프, 이탈 구간, 프로모션 반응, 웹에서 되돌아간 경로까지 한 장에 붙여 들고 들어가면, 예전처럼 마지막 순서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라이브 회의는 우리 팀이 사실상 주도하게 됐다.

우리는 접속 지표와 매출 추이, 업데이트와 이벤트의 효과를 함께 읽어내는 역할을 맡았다.

지표를 들여다볼수록 숫자는 내부 액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방학 시즌이 시작되면 접속 곡선이 먼저 달라졌고, 경쟁작이 대형 업데이트를 내는 주에는 같은 이벤트도 기대만큼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상승과 하락도 계절과 환경 변화, 시장 분위기와 경쟁작 동향까지 함께 놓고 봐야만 해석이 가능했다.

"이번 업데이트 효과는요?"

질문이 그렇게 먼저 우리 쪽으로 왔다.

나는 테이블 위 출력물을 손바닥으로 눌러 펴고, 어느 배너에서 발길이 꺾였는지, 어떤 영상 뒤에서 유입이 살아났는지, 웹에서 한 번 더 잡아야 할 구간이 어딘지 짚어 갔다.

회의에서 우리 팀 앞에 놓이는 질문도 달라졌다.

일정만 확인하던 자리가 아니라, 국내 라이브 전체를 놓고 어디에 힘을 실을지 먼저 묻는 자리가 되었다.


회의실 문 앞에 서면 나는 먼저 숨을 골랐다.

문고리에 손을 얹으면 손바닥부터 차가워졌다.

안으로 들어가면 누군가는 선을 그었다.

그 와중에도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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