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머무르는 배들

떠나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지는 질서에 대하여

iPhone7 Plus, 28mm, ISO20, f1.8, 1/120s




위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은 종종 생각보다 정돈되어 보인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들,

그 배들을 붙잡고 있는 선착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잔잔한 수면.

각각은 움직일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해진 자리에 머물러 있다.


배는 본래 떠나기 위해 존재한다.

항로를 그리고,

파도를 가르며,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사진 속 배들은

모두 정박 중이다.

떠날 준비를 마친 채,

아니면 이미 돌아와서,

잠시 물 위에 몸을 맡긴 상태다.


선착장은 묘하다.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서

모든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정지된 구조물 위에 서서

수많은 출발과 귀환을 감당한다.

누군가는 배를 타고 떠나고,

누군가는 배에서 내려오지만

이 자리는 늘 같은 모습으로 남아

질서를 유지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삶의 리듬을 본다.

항상 나아가고,

계속 변화하고,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배워왔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은

이런 ‘정박의 시간’으로 유지된다.

쉬지 않으면 떠날 수 없고,

머무르지 않으면 돌아올 곳도 없다.


수면은 고요해 보이지만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흐른다.

보이지 않는 조류가

배의 방향을 조금씩 조정하고,

부두의 위치를 확인하게 만든다.

겉으로는 정지,

안으로는 움직임.

아마 삶도 그렇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며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보다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떠날 용기만큼이나

머무를 결심이 필요한 시점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이 배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다음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일,

지금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은

서두르지 않을 때에만 완성된다.


사진이 나에게 건넨 한 문장


“떠나는 법만 배운 사람에게

머무름은 또 하나의 항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