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주소서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다가 소파에 누워 창밖을 보았다. 사선으로 비치는 반달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반달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안경제비인 내가 안경을 벗고 눈을 찡그렸을 때였다. 시야가 또렷해지자 그제야 달이 반쪽이라는 걸 알았다. 눈에 힘을 풀고 다시 보니 달빛이 번져 보름달처럼 보였다. 처음엔 보름달이라고 생각했다. 뭐 이런들 저런들 어떠랴. 내가 보았던 달이 내겐 보름달처럼 보였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달님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소원만 빌었다. 혹시라도 들어주실지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서. 마침 드라마 찬란하신 도깨비의 대사도 떠올랐다.
“생사를 오가는 순간이 오면 염원을 담아 간절히 빌어. 혹여 어느 마음 약한 신이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
간절하면 들어줄까. 정말 들어줄까. 들어줬으면 좋겠다. 나도 웃으면서 살 수 있게.
사람에게는 네 번의 생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은숙 작가가 이 드라마에서 정립한 독창적인 세계관이다. 불교의 윤회 사상을 현대적으로 풀어내 삶을 농사에 비유한다. 첫 번째는 씨를 뿌리는 생, 삶의 토대를 만들고 업을 쌓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두 번째는 물을 주는 생, 인내하며 가꾸는 시간이다. 세 번째는 수확하는 생, 결과를 마주하는 시간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그 결실을 누리며 삶을 아름답게 갈무리하는 생이다.
드라마적 설정이지만, 그 바탕에는 동양 사상이 흐른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윤회의 관점, 행한 대로 결과를 마주한다는 인과의 원리. 씨를 뿌리고 거두는 농경의 언어로 풀어낸 이 구조는 삶을 견디게 하는 하나의 방식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고난을 실패가 아니라, 아직 물을 주고 있는 과정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세계관은 설명이 아니라 위로로 다가온다.
가끔 궁금해진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생은 몇 번째일까. 앞으로 몇 번의 삶이 더 남아 있을까.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번째 삶을 살다 먼 길을 떠나셨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같은 바람을 되뇌곤 한다. 부디 두 분은 첫 번째 삶을 살다 가셨기를. 고생만 하시다 희미한 빛만 보고 돌아가신 분들이라면, 남은 세 번의 삶에서는 부유한 가정에서, 형제는 많지 않고 딱 둘만 있는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조실부모 없이 오래도록 보호받으며 살기를. 그렇게 네 번의 생을 다 누리고 천국에 가시기를.
나도 행복하고 싶다. 나도 네 번의 생을 다 누리고 가고 싶다. 불행하고 싶지 않다. 마누라도 있고 자식 둘도 있으니, 나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 아니, 참으로 행복하다. 그런데도 불행은 이따금 나를 찾아온다. 불행은 감기 같다. 이제는 익숙해진 감기.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감기처럼 불행도 주기적으로 나를 찾는다.
어릴 적의 트라우마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코와 귀와 입에 화장지를 넣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병풍 뒤에 삼베로 감싸여 있던 모습도. 너무 무서웠다. 엄마의 절규, 고개를 떨군 형의 모습, 누나들의 통곡.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울타리를 경계로 한쪽은 눈으로 덮여 있고, 다른 한쪽은 길로 이어진 풍경을 상상해 본다. 둘로 나뉜 세계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 이어지는 선이 있다. 울타리 하나가 그 경계를 따라 조용히 놓여 있다. 눈은 모든 것을 덮으려 하고, 길은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정지와 이동, 머무름과 진행. 서로 다른 성질의 두 세계가 한 프레임 안에서 어색하지 않게 공존한다.
울타리는 막기 위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방향을 알려준다. 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따라가야 할 기준처럼. 선 하나가 있기에 길을 잃지 않는다. 모든 경계가 허물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선은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 풍경을 보며 삶의 선택들을 떠올린다. 늘 명확하게 나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를 걷는 시간이 더 길다. 완전히 멈출 수도, 끝없이 달릴 수도 없는 상태. 그 중간 어딘가에서 속도를 조절하며 균형을 연습하는 일.
눈 위에 남은 발자국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길은 이미 다져진 방향으로 나를 이끈다. 자유와 안정은 늘 함께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경계 위를 걸으며 둘을 동시에 감당하는 법을 배운다. 선택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것도.
상상이 끝날 무렵, 문장 하나가 나에게 건네졌다.
“넘어야 할 때보다, 지켜야 할 선을 아는 순간이 삶을 더 멀리 데려간다.”
지켜야 한다. 버텨야 한다. 조금씩이라도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들이 산다. 그래서 움직이려고 한다. 이도령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이 지긋지긋한 불행을, 이제는 걷어차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