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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가야금 원장

그때 마침의 신묘막측함

by 제이

지지난 연말,
딸이 가야금 학원을 연지 4년 만에 제자들 중 몇 명의 합동연주회가 있었다.
무대 위에는 병풍이 둘러쳐졌고
바닥에는 돗자리를 대신해 방석이 깔렸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직장인 연주자들이 12줄 가야금, 25줄 가야금으로 여러 장르의 음악을 연주했다.
아름다운 한복으로 호사롭게 치장한 연주자의 가야금 연주를 가족 친지들이 감상했다.
듣는 이는 눈도 귀도 호강한 시간.
연주하는 이는 지난 몇 달간 연습한 결과를 엔조이한 시간.
뒤에서 자기 연주 차례를 기다리는 연주자들은 연주되고 있는 음악에 맞추어 몸이 흔들흔들.
빨리빨리와 편리함의 팍팍한 요즘 세태다.
거추장스러우나 우아한 한복이, 느릿느릿하나 힐링이 되는 비단실에서 뜯겨 나오는 가야금 소리가 참 아름답구나.

문득 1998년 캄캄한 어느 새벽이 생각난다.
운전하여 교회 가는 길의 그 사거리.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할 수 없던 그때.
딸은 중학생 때부터 고1이 되기까지 한 분에게 가야금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분과는 헤어져야 했다.
진로를 바꾸어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던 그때.
하기야 살다 보니 앞이 막막하던 때가 한두 번이던가?

그런데 지나 보니
그때 마침의 하나님 인도하심으로 여기까지 왔다.

1990년대, 아빠의 직장 일로 딸은 2년간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느 날, 학교에서 international night가 열렸다.
학생들이 각자 선조들 나라의 문화를 자랑하는 날.
각국의 민속 무용과 악기연주가 있었다.
어떻게 색동 한복까지는 준비해 가서 그날 입혔지만 우리나라의 문화에 대해서는 나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한국 부채, 인형, 소품들 그리고 황병기 선생님의 가야금 테이프 등을 준비해 가 그곳 선생님들에게 선물하긴 했지만.

한국에 돌아온 후
마음 한편에 생긴 숙제.
딸이 어릴 적부터 피아노, 플롯을 레슨 받고 있지만 우리 악기도 배워야 한다는 절박감.
그러나 이 지방에서 가야금을 배울 곳이 마땅찮았다.

어느 날.
지인 집에 갔다.
그 집을 나서는데 그 집 문밖에 떨어져 있는 가야금 교습학원 전단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집에서 차로서 왕복 40~50분 거리의 그 학원.
바로 등록을 시켰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엄마의 딸 라이딩이 시작되고
집안에 가야금 소리도 울리기 시작했다.

딸이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거진 3년간 한 선생님께 배웠는데 언젠가부터 의아심이 들었다.
이분에게 입시생 경력이 없는 거다.

그날
나는 교회 일이 늦게까지 있었는데 그날따라 일찍 하교하는 아들. 지인에게 아들 하교를 부탁드렸다.
내 일을 마치고 아들을 데리러 지인 집에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딸 가야금 학원 이야기가 나왔다.
다음날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 남편이 그 해, 마침 시청의 문화 쪽을 맡고 계셨는데 딸의 학원을 알아보니 입시전문은 아니란다.
감사했지만 그 학원을 그만두었다.
막상 그곳을 나오니 막막하다.
그 당시만 해도 국악의 인식은 낮았고 물론 교습소도 거의 없었다.
어떻게 물어물어 찾아가면 입시생은 힘든단다.
그 새벽, 교회 가는 차 안에서 든 생각, 무작정 국악과가 있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지를 보내어 레슨 하실 분 소개 부탁드려 볼까.
막막하구나...

딸은 얼마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채 어정쩡 공부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말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 직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우리 딸 이야기를 했지.
입시를 도와줄 가야금 선생님을 못 만나 진퇴양난을 겪고 있다고.
그랬더니 한 직원이 자기 부인이
마침 음대 강사인데 그 학교 가야금 교수를 안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가야금 교수를 소개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분은 직접 레슨을 할 입장이 아니라며 그분의 제자를 한 분 연결시켜 주셨다.
그녀는 예고에서 입시를 지도하시는 강사셨다.
그렇게 적합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인문고는 입시가 목표다.
2학년이 되니 음악 시간이 아예 없었다.
수업 중 실기레슨을 따로 받으러 가야 했다.

이젠 인문계냐 가야금이냐 진로를 결정할 시기.
학교에서는 밤늦게까지 책을 파고드는데 예대는 실기에 전력투구해야 할 시간.
진로를 결정 못 하고 차일피일하고 있었다.

학기 말, 학부형 면담시간이 있었다.
담임과 대화를 나누다가 어쩌다 장애인 아들을 언급했다.
여자 담임은 그분 남편이 장애인 복지 관계 일을 한다 하시며 그때부터 딸에게 부쩍 더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딸이 아예 예고로 전학할 것을 권유하셨다.

이렇게 딸은 2학년 후학기 때
마침 결원이 한 명 났기에
갑자기 예고 전학이 이루어졌다.
이미 예고에 나가시던 레슨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그 선생님은 마침 서울의 한 여대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계셨다.
그분으로 인해 산조 선생님 한 분을 소개받았다.
또 선생님 대학원 동기의 레슨 선생님을 소개받아 정악 할아버지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이렇게 딸은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 이곳에서 서울에서 레슨을 받았다.
혹 피아노 실기도 치르어야 하는 학교에 응시할지도 몰랐는데, 교회의 한 전공하신 분이 서너 달 감사하게도 무료로 도와주셨다.
주마다 모이는 성경통독모임의 어느 분은 본인의 음악학원을 빈 시간에 딸이 연습할 공간으로 사용케 해 주셨다.

전공 악기를 중학교 때 시작하는 건 늦은 것.
국악 전공과가 있는 대학이 많지도 않다.
작정하고 있는 대학에 실패하면 아예 지방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수시 자격이 되었다.
수시 자격은 전국규모 콩쿠르 입상자나 수능 국 영 수 점수가 상위권인 자.
예전 미국 초등학교 2년 다닐 때 교회에서 한국말 못 하는 그곳 교민 애들이랑 어울리던 것들.
그래서 익힌 영어가 생각지도 않은 높은 영어점수가 되어 수시 자격이 되었다.

응시한 그 학교는 입학 실기 시험기간 동안 기숙사를 제공했다.
채플도 있었다.
우리가 묵은 방은 우연히 121호.
시편 121편!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게 서로 다


실기시험에서 한순간의 실수도 실격이다.
불합격이다.
딸은 실기시험의 그 긴장과 떨림의 시간에 우연히 배정받은 121호의 말씀을 잡았다.

딸의 전공 수시 경쟁률은 높았다.
딸은 서울에서 시험 전날에도 레슨을 갔다.
선생님은 "에쿠 어렵겠구나, 일반시험에서 잘 치면 되지."
위로하셨다...

그런데
주께서 그 길로 인도하셨다.

그 여대에는 가야금 찬양단인 '예가회'가 있었다.
대학원에서는 조교로 학비보조도 받았다.
그리고
이제 ㅇㅇ 가야금 원장으로 그 아름다운 가야금을 즐기며 나누며
삶을 나눈다.

그때마침의 하나님
*그날 international night의 부담감.
*지인의 집 문밖의 가야금 전단지.
*아들을 맡겼던 지인의 남편이 마침 시청 예술담당.
*남편 직장 직원 부인이 음대강사.
*인문고 담임의 예고 권유.
*레슨 선생님의 대학원 친구로 인한 레슨선생님 소개.
*미국교회 영어점수로 수시시험.
*,시험 중 묵은 기숙사 121호.

*시편 121



2023년 겨울, 제자들의 연주회 날.
100인분의 저녁 요깃거리를 준비하신 한 학부형, 간식, 기념 타월을 자원하신 분들.
조명을 담당하신 분, 컴퓨터를 맡으신 분.
그리고
곡 완주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한 학생이 이날 연주 성공.
어느 초등학교 교사는 이 연주회를 끝으로 가야금으로 중국에 파견된단다.
국제결혼한 부모 밑에서 프랑스에서 자란 한 젊은이는 결혼하여 한국에 돌아와 가야금 소리에 반했다.
어느 청소년은 엄마 없는 그 공간을 가야금으로 또 학원 동생들과 연주하면서 채운다.
예술을 즐기는 것, 나누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그러나 지나 보니
그때마침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신묘막측하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라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찬송가 3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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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승권 유튜브, 가야금 이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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